- “내가 14세 때 아버지 끌려가
- 보도연맹원 좌익 딱지 붙여
- 군인들, 100명과 함께 학살
- 미군 폭격에 40여 명도 희생
- 명예회복 위한 법개정 절실”
“우리 정부도 이젠 한국전쟁 당시 억울하게 희생된 민간인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에 관심을 둬야 합니다. 좌우익의 첨예한 대립 속에서 발생한 보도연맹 희생자나 미군의 총격에 숨진 우리 부모 세대의 고통을 정부가 앞장서서 보듬어 줘야 합니다.”
 |
| 정현호 사천유족회장이 집무실에서 한국전쟁 당시의 민간인 피해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지난달 25일 경남 사천시 사남면의 한 사찰에서 100여 명의 유족과 함께 ‘한국전쟁 후 사천지역 민간인 희생자 합동위령제’를 올린 정현호(83) 유족회장은 “이 나이가 되도록 영문도 모르고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지 못한다면 저승에 가서도 뵐 면목이 없을 것 같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정 회장은 한국전쟁 초반이던 1950년 8월 25일, 국군 헌병대가 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이유만으로 100여 명의 양민을 무참히 학살한 현장에서 14살의 나이로 어머니, 큰아버지와 함께 직접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했던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당시 30살이었던 아버지 정태기(1920년생) 씨는 정동면사무소에 근무하면서 농민 계몽운동에 적극적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유학해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해방과 함께 귀국했던 아버지는 가난하게 살아가던 당시의 농촌 주민이 잘사는 사회를 만드는 데 앞장섰다. 이로 인해 아버지는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위로부터 ‘좌익’이라는 딱지가 붙었고 정부 주도의 보도연맹에도 가입했다.
정 회장은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권은 국군에 대한 정보가 보도연맹원을 통해 북한의 인민사령부로 전달돼 전쟁이 불리하게 돌아간다고 의심했고, 전쟁 중인데도 전국의 보도연맹원을 처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당시 내무부 장관을 지낸 사람이 총재를 맡을 정도로 보도연맹은 관변단체였기 때문에 별다른 의심 없이 사람들이 가입했으며 대부분은 순박하고 평범한 농민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아버지는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한 인텔리로 국회의원 출마가 거론될 정도였다. 당시 내무부는 농촌 부흥 운동과 좌익 전향자 계몽 등을 위해 보도연맹에 가입하라고 종용했는데, 국방부는 이적행위가 의심된다며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7월 중순 사천의 곤명면 마곡·조장마을에서 주민들이 미군에게 억울하게 학살되는 일도 있었다. 희생자들은 비행기 소리에 놀라 마을 빈터나 개울가에 대피했다가 어처구니없는 봉변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때 희생자 유족들이 미국 백악관과 국회의사당 앞에서도 집회를 여는 등 미군이 자행한 학살에 목소리를 높였으나 허공에 울릴 뿐이었다. 미군이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쌍굴다리 사건에 대해선 사과하면서도 마곡·조장마을 사건에는 침묵하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정 회장은 “우리처럼 전쟁의 아픔을 안고 있는 사람이 사천지역에만 113명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된다. 국회에 계류된 과거사정리기본법 개정안이 하루빨리 통과돼 억울하게 희생된 원혼을 달래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또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힐 것을 우려한 유족이 피해 신고를 기피하는 경향은 여전하다. 이젠 정부가 희생자의 넋을 기리고 가족이나 후손의 아픔을 위로하는 전향적인 자세를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사천유족회는 2008년 보도연맹 관련자 46명과 미군 폭격 피해 관련자 40명 등 총 86명으로 발족, 해마다 추모제를 봉행하고 있다. 추모관이나 추모탑 등이 마련되지 않아 올해는 사천시의 지원으로 사남면의 한 사찰에 위패를 영구 안치하고 합동위령제를 올렸다.
글·사진=이완용 기자 wyle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