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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주의 책과 세상 <21> 대하소설이라는 깊고 푸른 강

세상을 넓게 멀리 보고싶다면 대하소설 펼치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0-10-27 20:17:51
  •  |   본지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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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원주에 있는 고 박경리 '토지문학관'에는 대하소설 '토지'의 작품무대를 표시한 지도가 있다. 일본 대한민국 중국까지 펼쳐진 작품무대를 지도로 보면서 가슴이 설레었다. 평사리 들녘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등장인물의 삶의 굴곡을 따라 넓은 땅으로 이어져 나가는 것을 눈으로 보고 있자니, 도도하게 흐르는 장엄한 강과도 같다는 대하소설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조선 후기 보부상의 삶과 애환을 그린 김주영의 '객주'를 읽고 있으면 이 나라 방방곡곡 장터를 거닐고 있는 기분이 든다. 실제로 작가는 보부상들이 걸었던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었고, 시골장터에 머물며 작품을 완성했다. 백화점과 대형마트에 밀려 점점 사라지고 있는 재래시장을 다시 세워야 할 때 소설에서 나열하고 있는 품목들을 그대로 가져다 놓으면 될 것이다.

최명희의 '혼불'은 우리 전통 풍습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고 말해주는 어른도 없을 때 소설 속 장면만 그대로 따라하면 전통혼례도, 장례도 완벽히 재현해낼 수 있을 정도다. 이 소설을 일러 '대하예술소설'이라 한 것은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다. 홍명희의 '임꺽정'은 조선의 정서를 표현하려 했다는 작가의 의지가 담겨 신분사회를 살아냈던 조선 민초의 삶이 수백편의 사극드라마처럼 펼쳐진다.

이렇듯 등장인물들과 시대상황이 어우러져 엮어내는 대하소설은 사람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한 국가의 존망이 무엇인지 말해준다. 기본 10권은 넘는 방대한 분량의 대하소설을 읽을 엄두가 안 난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쁘기도 하고, 등장인물이 워낙 많아 혼란스럽고 줄거리 따라잡기도 쉽지 않다고 여러 이유를 대기도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대하소설의 깊이는 우리가 쉽게 손을 뻗어 가벼운 기분으로 읽는 그런 이야기들과는 다르다. 몇 십년동안, 독자들이 끊임없이 읽고 있는 책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인간 발자취를 기록하는 것이 역사라면, 대하소설에는 그 역사를 온몸으로 관통해갔던 사람들의 체취가 있다. 헤아릴 수 없는 인간 군상이 등장해 각양각색 삶을 펼쳐간다. 선인은 선인대로, 악인은 악인대로 온 힘과 마음을 다해 작품 속에서 한평생 살아간다. 지금 이 순간 우리들처럼 말이다.

젊은이들에게, 학생들에게 대하소설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범사에 일희일비하면서 초조한 일상, 사소한 일에 얽매어 심란해지거나 분노하기 십상인 졸렬한 하루하루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지치고 상처받는가. 마음이 조금만 더 넓어지고 조금만 더 멀리 볼 수 있다면, 지금보다는 한 발자국 더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면 대하소설을 펼쳐보기 바란다.

대하소설을 읽기 위해서는 호흡조절이 필요하다. 긴 호흡으로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스크린에 보이는 장면을 보며 즉각 웃고 울고 탄식하고 반응하는 영화와는 다르다. 감각적인 문장으로 감성을 터치해서 순간 현혹돼 빠져버리는 단순한 스토리도 아니다. 눈으로 읽고 가슴으로 느끼고 머리로 생각하며 3분의 1 지점에는 이르러야 등장인물 이름이 익숙해지고 작가의 걸음을 따라 잡을 수 있는 게 대하소설 아닐까.

그렇게 천천히, 가끔은 앞 페이지를 펼쳐 다시 확인해가며 어느새 낯설어져버린 단어에서 우리말도 배우고, 교실에서 배우지 못한 역사를 알아가기도 하면서 그렇게 천천히 읽어가는 거다. 그렇게 읽어 마침내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 가슴 차오르는 희열이 있다. 땀 흘리며 산을 올라 산 아래를 바라볼 때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사느라 주눅 들고 졸아들었던 마음이 일순간 탁 트이는 호연지기를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한 번쯤 대하소설과 맞붙어 싸워보자. 긴 호흡이 끈기를 주고, 읽고 난 다음에는 한 차원 높은 단계로 자신이 올라섰음을 느끼게 될 수 있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에서 책은 대하소설이 아닐까. 길고 방대한 책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동의대 문헌정보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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