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전반에 채색필사본으로 제작된 '경강부임진도(京江附臨津圖)'. 토정 이지함 선생이 당시까지 일반인들에게 널리 각인돼 있어 그가 살았던 지역이 '토정(土亭·점선)'으로 지도에 나타나 있다.

'토정비결'의 저자로 알려져 기인(奇人)의 이미지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이지함(李之:1517~1578). 이름보다도 '토정'이라는 호로 더 유명한 이지함. 그러나 그는 16세기를 살아가면서 백성들의 삶의 문제 해결에 누구보다도 노력한 실천적인 지식인이었다. 그의 문집 '토정유고'를 통해 시대를 앞서갔던 한 지식인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 본다.


▲국부(國富)의 증진을 위하여

'땅과 바다는 백가지 재용의 창고입니다. 이것은 형이하(形而下)의 것으로 이것에 의존하지 않고서 능히 국가를 다스린 사람은 없습니다. 진실로 이것을 개발한 즉 그 이익이 백성들에게 베풀어질 것이니 어찌 그 끝이 있겠습니까? 씨를 뿌리고 나무 심는 일은 진실로 백성을 살리는 근본입니다. 따라서 은은 가히 주조할 것이며, 옥은 채굴할 것이며, 고기는 잡을 것이며, 소금은 굽는데 이를 것입니다. 사적인 경영으로 이익을 좋아하고 남는 것을 탐내고 후한 것에 인색함은 비록 소인들이 유혹하는 바이고 군자가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지만 마땅히 취할 것은 취하여 백성들을 구제하는 것 또한 성인이 권도(權道)로 할 일입니다.'(토정유고 '리포천현감시상소(抱川縣監時上疏')

토정 선생이 지은 문집 '토정유고' 서문.

1573년(선조 5) 오랜 재야 생활 끝에 포천현감을 맡은 이지함은 피폐해진 국가 경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농업에만 집착하지 말고 모든 산업을 골고루 개발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혁신적인 상소문을 올렸다. 백성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성인도 권도(임시 방편)를 펼 수 있다는 이지함의 사회경제사상은 당시 사회에서 매우 진보적인 것이었다. 전통적으로 농업이 중시되고 상업이나 수공업이 천시된 당시 사회에서 백성들의 생활향상을 위한 방안으로 이지함 만큼 적극적으로 말업의 가치를 인정한 학자는 흔치 않았다.

이지함은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의 많은 백성들이 굶어죽게 되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어업이나 상업, 수공업, 광업 등에도 관심을 기울여 육지건 해양이건 국토에서 산출된 자원을 적극 개발, 이를 통해 국부를 증대하는 것만이 해결책이라 믿었다. 이지함은 단지 구상에 그친 것만이 아니라 자신이 구상한 방안을 직접 실천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했다. 전라도 만경현의 양초(洋草)라는 곳을 임시로 포천현에 소속시켜 이 곳에서 고기를 잡아 곡식과 바꿀 수 있도록 해 줄 것을 청했으며, 황해도 풍천부 초도의 염전을 임시로 포천현에 소속시켜 염전으로 활용하여 소금을 곡식과 바꿀 수 있도록 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지함은 어업과 염업의 이익을 활용하여 백성들을 구휼하겠다는 방안을 제시했으며, 나아가 포천이 부유해지면 이곳을 다른 읍에 이속시켜 널리 백성들에게 헤택을 베푸는 계획까지 세웠다. 이러한 생각은 덕과 재물을 본(本)과 말(末)에 비유한 부분에서도 나타난다. '대개 덕은 본이고 재물은 말입니다. 그러나 본말은 어느 한쪽이 치우치거나 폐지되어서는 안됩니다. 본업으로써 말업을 제어하고, 말업으로써 본업을 제어한 후에 사람의 도리가 궁해지지 않습니다'고 하여 본업과 말업의 상호 보완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논거를 토대로 이지함은 농사가 근본이고 염철은 말업이지만, 근본과 말업이 서로 견제하고 보충하여 조화를 이루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백성들의 삶에 도움이 된다면 어떠한 경제적 행위도 할 수 있다는 이지함의 입장은 농업이 전통적으로 중시되던 당시의 분위기에서는 매우 혁신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당대에는 그다지 호응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시대를 뛰어넘어 유형원이나 박제가와 같은 실학자들에 의해 주목을 받았다. 박제가는 그의 저술 '북학의'에서 이지함의 상업관과 해외통상론을 높이 평가하였다.


▲바다와의 깊은 인연

충남 보령시 오천면 고정리에 있는 이지함 선생 묘.

이지함의 혁신적인 사회경제사상의 뿌리는 그의 해안적인 기반에서 찾을 수 있다. 이지함의 주된 활동 지역은 출생지인 충청도 보령에서 서울의 마포를 연결하는 곳이었다. 특히 고향인 보령은 친가, 외가를 아울러 그의 일족들이 크게 이름을 떨친 곳으로 해안가에 직면한 지역이었다. 이지함은 아산과 포천에서 잠시 현감을 지내기도 했으나 주로 충청도와 서울의 마포 일대에서 활동했다. 워낙 유랑하기를 좋아하여 배를 타고 제주도에 3번 들어간 적이 있기도 했으나, 주된 지역 기반은 충청도와 서울 지역으로 볼 수 있다. 그가 거처했던 마포의 토정은 서해와 통하여 팔도의 배가 모이는 곳이었으며, 특히 이지함은 배를 타는데 익숙하여 해상을 두루 돌아다녔다.

이러한 까닭으로 이지함을 묘사한 글에는 '바다'가 자주 등장한다. 이지함 스스로도 자신을 '해상에 사는 광민(狂民)'으로 표현했으며, 제자 조헌은 '해우(海隅)'에 은거한 이지함을 찾아가 학문을 배웠다고 했다. 이지함이 어렸을 때 어머니의 장지(葬地)가 해안에 가까이 있어 조수가 밀려옴을 걱정하여 옮겼다는 기록이나, 성품이 배타기를 좋아하고 항해 중에 조수의 흐름을 알아 위험을 만나지 않은 것, 어염 등 해상의 경제활동에 대한 대책을 제시한 것 등은 그의 이러한 해안적 기반과 관계가 깊다. 이이가 이지함의 제문을 쓰면서 '수선(水仙)'이라 표현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지함의 학문과 사상에서 농업 중심의 경제 질서에 집착하지 않고, 상업이나 유통경제에 관심을 두는 측면이 많아 나타나는 것 또한 이러한 해안적인 기반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고 판단된다.


▲백성의 편에서 살아간 삶

이지함은 생애의 대부분을 처사적 삶을 살면서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이러한 유랑생활을 통하여 생활고에 시달리는 많은 백성들을 접하였다. 그의 사회경제사상의 핵심이 민생문제 해결에 있었던 것도 이러한 경험의 바탕 위에서 나온 것이었다. 특히 신분이 미천한 사람이라도 능력이 있으면 문인으로 받아들이는 그의 개방성은 미천하고 한미한 사람들과도 격의 없이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지함은 민생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그가 돌아다니던 곳의 주민들에게 장사하는 방법과 생산기술을 가르쳐 무엇보다 자급자족의 능력을 기를 것을 강조했다. 또한 가난한 주민들에게는 자신이 소유한 재물을 고르게 분배해 주었으며, 무인도에 들어가 박을 심어 수만 개를 수확해 바가지를 만들어 곡물 수천 석과 교환하여 빈민을 구제하기도 했다. '토정유고'나 '연려실기술' 등에 나오는 이런 기록들은 아주 단편적인 것이지만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때 토정의 행위는 적극적인 계획과 실천, 그리고 백성들의 광범위한 없이는 이루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특히 명문가의 후손임에도 피지배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위치에 서서 직접 수공업이나 상업, 수산업에 종사한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지함의 사회경제사상은 농업중심사회의 자급자족사회에서 상업과 과학에 기초한 개방의 시대로 바뀌어 가는 사회변화와 관련이 있다. 특히 16세기에도 이미 이지함과 같은 선구적인 인물에 의해 국부의 증대를 위해서 유용한 학문과 사상을 적극 도입하자는 주장이 제시되고 있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제 이지함은 '토정비결'로만 연상되는 기인이 아니라 선구적인 사회경제정책을 제시한 사상가이자 개혁가로 자리매김 되어야 한다. 이지함에 대한 재평가는 아담스미스 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국부론'을 주장한 토종 조선인 학자를 만날 수 있는 즐거움을 가져다 줄 수 있다.



# '토정비결' 이지함의 저작 ?

민간에서 이지함은 '토정비결'의 저자로 유명하다. '토정비결'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이지함의 저작이라는 설과 그의 이름을 가탁(假託)한 것이라는 주장이 함께 제기되고 있는데, '토정비결'이 이지함 사후에 유행하지 않고 19세기 후반에 널리 퍼진 점 등으로 볼 때 이지함의 이름을 후대에 가탁한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특히 조선시대 세시풍속을 정리한 '동국세시기'나 '열양세시기'와 같은 책에 오행점이나 윷점을 언급하면서 '토정비결'에 대해 소개하고 있지 않은 부분은 조선시대에 '토정비결'이 거의 유행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토정비결'에서 내포하고 있는 뜻과 이지함의 사상이 상통하는 측면은 많다. '토정비결'에는 '주역'에 바탕한 상수학(象輸學)의 사고가 많이 반영되어 있는데, 이지함은 '주역'에 해박하였다. 당시 '주역'이나 상수학에 관심이 깊었던 학자들은 '기(氣)'에 관심을 가지면서 당시의 사회상황을 안정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변화가 요구되는 시기로 파악하였고, 이러한 변화에 대한 갈망이 후대의 '토정비결' 편찬에도 반영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민간의 염원을 담은 그 비결의 이름에, 조선시대 백성들에게 가장 친숙했던 학자 '토정'을 붙임으로써, 책의 가치와 영향력을 더 높였다고 볼 수 있다.


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