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궤는 '의식(儀式)'과 '궤범(軌範)'을 뜻하는 말로, 선왕의 전통을 그대로 지켜나가려는 의지가 강했던 조선왕실에서는 국가의 중요한 행사가 있으면 가능한 전대의 법도에 따라 의궤를 간행했다. 따라서 다수의 의궤는 왕실의 혼인, 잔치, 장례식, 산릉의 조성 등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왕실 의식을 시리즈 형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그런데 규장각에 소장된 의궤의 전체 목록을 검토해 보았을 때 광해군 대에 제작된 의궤 중에서는 후대에 그대로 이어지지 않는 의궤가 몇 종 눈에 띄고 있다. 의궤를 통해서 광해군 정권의 성격을 찾아볼 수는 있지 않을까?


▲외교에 눈을 뜬 왕, 광해군

광해군이 1609년 4월 부왕 선조의 장례식에 참석한 명나라 사신 웅화 일행을 영접한 과정을 담아 편찬한 '영접도감 사제청의궤' 표지와 내지 그림. 1610년에 필사본으로 편찬됐다.

의궤는 조선 전기부터 제작된 것으로 기록에 나타나지만, 현존하는 의궤 중 가장 오래된 것이 선조 대 후반인 1601년(선조 34)에 제작된 '의인왕후 빈전혼전도감의궤'와 '의인왕후 산릉도감의궤'이다. 따라서 광해군 대에 제작된 의궤는 현존 의궤 중에는 상당히 시기가 오래된 것으로 분류된다. 광해군 대에 제작된 주요 의궤는 △선조의 국장, 부묘, 묘호 개상, 존호와 관련 의궤 △명나라 사신을 영접한 의궤 △생모인 공성왕후의 추숭에 관계된 의궤 △화약무기를 제작한 과정인 '화기도감의궤' △천문관측기구를 보관하는 흠경각과 보루각 건축 의궤 △제기(祭器) 제작에 관한 의궤 △'삼강행실도'를 새로 펴낸 과정을 정리한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 등이다. 이 중 '화기도감의궤'와 '흠경각영건의궤' '보루각영건의궤' '영접도감의궤'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는 광해군 대에만 특별히 제작된 의궤들로서, 국방과 외교 분야에서 큰 성과를 이룬 광해군 정권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여겨진다. 광해군 재위 16년간 27종의 의궤가 편찬되었다. 그런데 그 중에 6종이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외교와 관련되는 의궤라는 점이 우선 관심이 간다. 선조의 국상에 조문하러 온 사신과 광해군의 국왕 책봉을 위해 파견된 사신의 영접에 관한 의궤들을 작성한 것은 외교와 의전에 관한 전례를 만들려는 노력의 소산으로 보인다. 특히 외교 관련 의궤가 작성된 것은 이때가 최초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흔히들 광해군 대 정권의 큰 특징으로 '실리외교'를 지적하는데, 광해군 즉위 직후 외교 관련 의궤가 편찬된 것에서 광해군 정권의 기본적인 성격을 파악할 수가 있는 것이다. 광해군은 1609년 4월 부왕 선조의 장례식에 참석한 명나라 사신 웅화(熊化) 일행을 영접한 과정을 '영접도감 사제청의궤(賜祭廳儀軌)'로 편찬하였으며, 이 해 6월 자신의 국왕 책봉을 위해 참석한 사신 유용(劉用) 일행을 접대한 과정을 정리한 '영접도감도청의궤' '영접도감 미면색의궤'를 편찬하였다.


▲국방과 과학의 뜻이 담긴 의궤들

위에서부터 차례대로 '영접도감 도청의궤'와 '영접도감 미면색의궤', '화기도감의궤'.

1614년 광해군은 평안병사 이시언의 보고를 받았다. '수성(守城)하는 기구로는 화기(火器)만한 것이 없는데 그중에 화포가 최상이요, 삼안총(三眼銃)도 말 위에서 사용하면 아주 좋은데 중국 사람들도 말 위에서 사용합니다. 바야흐로 양쪽이 서로 대치하고 있을 때 하나하나 모두가 꼭 명중한다고는 할 수 없어도 적들이 반드시 두려워할 것입니다.'라는 것이 보고의 주된 내용이었다.

임진왜란 때 직접 참전활동을 한 경험이 있는 광해군은 화기 제작의 필요성을 직감했고, 광해군의 독려 속에 국가적으로 화기 제작에 착수했다. 화기도감에서 불랑기(佛狼機), 삼안총(三眼銃) 등 각종 화약 무기가 만들어졌고 그 제작 과정은 1615년 '화기도감의궤'로 기록되었다. 제작된 무기에 대한 그림도 의궤에 담겨졌다. '화기도감의궤'는 조선시대의 의궤 중에서 무기에 관한 내용을 기록한 유일한 의궤라는 점에서 역시 시대의 분위기를 잘 대변해준다고 할 수 있다.

광해군 대에는 세종시대에 꽃을 피웠던 과학적 전통을 계승하였다. 아쉽게도 현재 남아있지는 않지만 '흠경각영건의궤'와 '보루각수개의궤'는 이러한 흐름을 보여주는 의궤이다. '세종실록'의 기록에서도 보듯 흠경각은 조선 과학의 중심 건물이었다. 세종은 흠경각을 편전인 천추전 가까이에 짓고 수시로 드나들며 천체의 운행을 관찰하였다. '흠경각영건의궤'는 광해군 대에 흠경각 건물을 다시 만든 과정을 기록한 의궤였다. 보루각은 세종 15년 가을에 완성하여 그 안에 자격루를 설치한 곳이다. 보루각은 광해군에 의해 다시 주목되었다. 1614년(광해군 5) 광해군은 보루각을 다시 세운 후 그 개수 과정을 의궤로 정리하게 했다. 현재 이름만 전하는 '보루각개수의궤'는 그 때의 상황을 정리한 것이다. 세종 때 천문과 과학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한 바탕 위에서 건립되었던 흠경각과 보루각이 광해군 대에 새롭게 조명되고 있었다는 점은 중요하다. 그만큼 광해군이 과학과 실용문화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이를 적극 실천하려는 의지가 강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광해군 대에 추진된 대동법, 주전론(鑄錢論), 은광 개발 등의 사회경제 정책과 흠경각, 보루각의 설치는 광해군의 이미지에 '실용'과 '과학'을 더한다.


▲광해군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역사학계의 주요한 이슈 중의 하나다. 최근 1623년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포악한 군주상에서, 대동법, 화폐 주조, 은광 개발 등 적극적인 사회경제정책을 추진하고, 탁월한 외교적 감각으로 실리외교를 수행한 현명한 군주라는 쪽으로 시각의 방향이 돌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광해군 대에 대북 세력에 추진된 무리한 왕권강화책과 그로 인한 '폐모살제(廢母殺弟:어머니(인목대비)를 폐위시키고 동생(영창대군을 죽임)'와 북인의 학문적 연원인 남명 조식을 문묘에 종사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 출향(黜享) 논의는 사류들의 강한 비판을 받았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과 북인 정권은 역사의 전면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광해군 정권의 실패는 개혁정책의 방향이 옳더라도, 독선적인 정국 운영은 더 큰 반동을 야기시킬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광해군은 국방이나 외교, 과학에서만은 탁월한 군주임에는 분명하였다. 명과 청의 세력교체라는 국제정세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바탕으로 실리외교를 수행한 것이나 화기제작을 통해 국방 강화에 주력함으로써 '예견된 전쟁'을 슬기롭게 막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과학 중시의 사고가 그 바탕에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의 시대에 제작된 '영접도감의궤'과 '화기도감의궤' '흠경각영건의궤' 등은 그 능력을 축소판처럼 보여주고 있다.




# 외교관련 의궤 제작이 인조대에 끝난 까닭은?

- 청나라로 기운 국제판도 영향

- 존화주의 집권세력 편찬 중지

조선시대 외국 사신의 접대를 기록한 '영접도감의궤'는 광해군 대에 최초로 제작되었다. 이후 인조 때에 몇 차례 더 제작되기는 하지만, 1643년(인조 21)을 끝으로 외교 관련 의궤는 제작되지 않았다. 이것은 중국의 지배자가 청나라가 된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판단된다.

전통적으로 오랑캐라고 멸시하던 청나라 사신의 영접을 위한 의궤 제작은 조선의 자존심과도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인조 이후 정권 주도층이 명분과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강조하던 서인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영접도감' 의궤가 인조 시대를 끝으로 단절되는 원인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인조 이후 청에 군사적으로는 비록 패배했지만 문화적으로는 우월하다는 인식과, 멸망한 명에 대해 계속된 존화(尊華) 사상은 현실의 국제 관계를 용납하지 않는 원인이 되었고, 외교 관련 의궤는 전통으로 자리를 잡지 못하였다.

효종대 전 국가적으로 추진된 북벌론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극복하지 못하고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북핵 위기' '6자 회담' '이라크 파병' 등 외교 관련 용어가 중요 키워드로 떠오르는 요즈음, 조선시대 우리 선조들이 추진한 '성공'과 '실패'의 외교 경험들이 전혀 낯선 일로만 느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