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계 유형원(1622~1673) 선생이 쓴 '반계수록'. 모두 26권으로 구성된 반계수록에는 조선 중기 토지·교육·과거·관직·군사제도 등 시대의 고민을 담아 구체적인 제도개혁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유형원 선생은 일찌감치 관직의 뜻을 버리고 실학사상을 체계화해 후대에 탁월한 경세가로 평가받고 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정부나 기업을 막론하고 '혁신'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들려온다. '개혁' 보다는 뭔가 강해야 하고, 그렇다고 '혁명'이란 용어를 쓰는 것은 국가전체를 뒤흔든다는 느낌이 있어서 그런지 혁신이란 말을 즐겨 쓰고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극복하고 사회의 재편이 요구되었던 17세기 중, 후반 시기 조선사회는 새로운 사상으로 '실학'이 대두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실학에서 가장 크게 강조된 개념이 개혁이었다.

유형원(柳馨遠:1622~1673)은 '개혁'의 방향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면서, 시대가 요구하는 정책 대안들을 정리해 나갔다. '반계수록'은 그의 학문과 사상이 결집된 책이자, 조선후기 실학의 선구적인 저술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시대 사상사에서 17세기 중, 후반의 시기는 주자성리학이 대세가 되어가면서도, 이에 대한 비판으로 새로운 학풍인 실학이 대두되는 시기였다. 이 시기 실학을 체계화한 학자가 바로 유형원이다.

유형원은 북인이었던 부친 유흠이 인조대에 광해군의 복위를 꾀하였다는 혐의에 연루되어 사망하자, 관직에 뜻을 버리고 조상 대대로 하사받은 전북 부안의 우반동을 중심지로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의 호 반계는 '우반동의 계곡'이라는 뜻에서 따온 것. 안정복은 유형원의 연보에서 '선생은 당쟁이 횡행할 때 태어나 세상을 등지고 스스로 저술하기를 즐겼다'고 하여, 유형원이 실학자가 된 것이 당쟁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18세기의 실학자 이익은 특히 유형원을 존경하여 '국조 이래로 시무를 알았던 분을 손꼽아 봐도 오직 이율곡과 유반계 두 분이 있을 뿐이다. 율곡의 주장은 태반이 시행할 만하고, 반계의 주장은 그 근원을 궁구하고 일체를 새롭게 하여 왕정(王政)의 시초를 삼으려했다'고 하여 유형원을 탁월한 경세가로 평가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유형원'하면 떠올리는 개혁가, 실학자의 이미지는 그의 저술 반계수록이 담고 있는 토지, 교육, 과거, 관직제도에 이르는 탁월한 개혁안 때문이다.

'수록(隨錄)'은 '붓 가는대로 따라서 쓴 기록'이란 뜻이지만, 유형원은 결코 한가하게 책을 써 내려가지 않았다. 시대의 고민을 담아 구체적인 개혁 방안까지 제시하면서 한 편 한 편을 써 내려갔다. 치밀하게 사회와 경제 문제를 고민하고 그 대책을 제시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았다. 스스로가 쓴 서문에서 유형원은 개혁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절박한 현실임을 강조하면서, 과거 위주의 공부보다는 실제 현실에 필요한 정책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함을 역설하였다.

유형원은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일정한 스승 없이 생활했으나, 고모부인 김세렴에게 학문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김세렴은 호조판서, 평안도관찰사 등을 지내면서 조선의 주요 사회경제 정책을 추진한 관리였다. 유형원은 5세 때 김세렴에게 수학했으며, 15세 때는 병자호란을 피하여 김세렴의 본가를 찾았다.

특히 김세렴이 함경도관찰사, 평안도관찰사를 역임하던 시절 유형원은 이곳에 찾아가 기거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경험은 20대 초반의 유형원으로 하여금 북방에 대한 지식을 얻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유형원은 말년에는 부안의 우반동에서 거처했지만, 젊은 시절에는 전국 각지를 두루 돌아다녔다. 1636년에 병자호란 때는 강원도 원주로 피난을 갔으며, 1642년에는 경기도 지평에, 다음해에는 경기도 여주에 거처를 잡았다. 1643년 겨울에는 고모부 김세렴이 함경도관찰사로 부임하자 그 곳에 따라가 북방 지역의 실상을 경험하였다. 이후에도 유형원은 금천, 안양, 영남, 호서지방, 금강산 등지를 두루 돌아다녔다. 이러한 북방에서의 생활 경험과 전국을 두루 순력한 것은 유형원의 사회개혁 정책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유형원은 한정된 지역에서만 거처했던 것이 아니라 다양한 지역 경험을 가지면서 당시의 현실을 목격한 학자였다. 그의 대표작 반계수록에서 토지제도와 농업, 교육 문제 등에 대해 다양한 개혁 정책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경험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반계수록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가 보자. 반계수록은 총 26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1~2는 전제(田制), 권3~4는 전제후록(田制後錄), 권5~6은 전제고설(田制攷說), 권7~8은 전제후고설로, 무엇보다 저자가 토지제도에 깊이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국가에서 토지를 농민들에게 고르게 분배하고 환수할 수 있는 균전제(均田制)의 실시로 자영농 육성을 우선할 것을 주장하였다. 권9~10은 교선지제(敎選之制), 권11~12는 교선지설(敎選之說)로 교육과 과거의 문제점과 그 대책을 담고 있다. 유형원은 과거가 출세의 도구가 되어 선비들이 오직 옛 문구만 모으는 것에만 치중하는 현실을 개탄하면서 그 대안으로 추천제인 천거제(薦擧制)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권13은 임관지제(任官之制), 권14는 임관고설, 권15~16은 직관지제(職官之制), 권17~18은 직관고설로, 관직의 정비에 관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유형원은 관료의 임기제를 철저히 지켜 행정의 실효성을 주장하고, 왕실을 위하여 설치된 많은 관청은 대폭 축소하여 국가의 재정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현대의 정책에도 실현되고 있는 '작은 정부'의 구상과도 유사하다.

권19는 녹제(祿制), 권20은 녹제고설로 관료의 봉급을 증액시켜 부정이 없도록 하며, 특히 봉급이 전혀 지급되지 않는 하위직 서리에게도 일정한 봉급을 지불하여 백성들을 수탈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방안을 제시한 것이 주목을 끈다. 권21에서 권24는 병제 등 국방과 군사제도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병농일치의 군사조직과 함께 성지(城池)의 수축과 무기의 개선, 정기적인 군사훈련의 실시 등을 주장하고 있다.

1670년께에 완성된 반계수록은 저자 유형원이 재야의 학자였던 까닭으로 처음에는 그 가치를 크게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1678년(숙종 4) 유형원과 교분이 깊었던 배상유가 상소문을 올려 반계수록에서 제시한 정책을 시행할 것을 청하였고, 1741년(영조 17)에는 승지 양득중이 경연에서 반계수록을 강론하자는 요청을 하는 등 꾸준히 반계수록의 중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마침내 영조 때인 1760년 반계수록은 경제에 관련한 탁월한 저술로 인정을 받아 국가에서 3부를 인쇄 간행하였다. 재야 학자의 저술이 사후 100여년 만에 그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정조 역시 반계수록에 주목하였다. 정조는 화성을 건설하면서 우리나라 학자들의 성제(城制)에 관한 이론을 검토한 끝에 반계수록에서 수원에 성지(城池)를 건축해야 한다는 주장을 주목하였다.

정조는 '100년 전에 마치 오늘의 역사를 본 것처럼 논설하였다'면서 유형원을 높이 평가하고, 수원성의 건축으로 그 이론을 실천에 옮겼다. 반계수록은 유형원이 활동하였던 시대를 뛰어넘어, 영조와 정조처럼 현명한 군주의 시대에 그 가치를 더욱 인정받았던 것이다. 또한 이익, 정약용으로 이어지는 남인 실학자의 개혁 사상의 원류가 되면서, 반계수록은 '개혁교과서'의 모범으로 인식되었다. '혁신'이라는 구호만 요란했지 알맹이가 없는 요즈음의 세태에서, 축적된 학문을 바탕으로 차원 높은 개혁안을 제시한 유형원과 같은 인물을 찾을 수는 없을까?

◇ 유형원은 누구
- 문·무·의약 등 다방면 능통한 '팔방미인'


유형원 하면 실학을 체계화한 그의 대표작 '반계수록' 때문에 사회개혁가의 이미지를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유형원의 실상을 보면 다양한 학문에 두루 능통했던, 그야말로 '팔방미인'의 모습이 잘 나타난다.

이익이 쓴 유형원의 전기에 의하면, 유형원은 문예·사장(詞章)·병법·천문·지리·의약·복서(卜筮)·산학(算學) 등에 이르기까지 두루 능통했음이 나타난다. 이러한 학문의 폭은 이미 알려진 역사책 '동사강목' 이외에, 어학에 관한 '정음지남(正音指南)' '동국문초', 지리지인 '동국여지지', 병법서인 '기효신서절요(紀效新書節要)'와 '무경(武經)', 도가서인 '참동계초(參同契抄)'의 저술로 나타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반계수록과 동사강목, 동국여지지 등만이 현재 남아 있어서 그의 폭넓은 학문세계는 잊혀졌다. 남인 실학자의 계보는 대체로 유형원의 학문이 이익을 거쳐 안정복, 정약용 등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리고 이익이 '성호사설'을, 안정복이 '잡동산이'와 같은 백과사전적인 저술을 남긴 것에서, 다양한 학문에 능통했던 유형원의 영향력을 떠올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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