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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을 위한 동화 <27> 가시 면류관, 눈 속을 걷다

"아저씨, 혹시 예수님 아니세요?"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07-01-11 18:10:50
  •  |   본지 3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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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오순환


소스락 소스락.

겨울 밤하늘에 웬 때 아닌 나비 떼일까. 올 들어 처음 보는 함박눈이다. 눈발은 하느작하느작 조심스럽게 내려앉는다. 가난한 동네 부끄러운 지붕 위에도, 맨몸의 연탄아궁이 위에도 사뿐 발을 내딛는다.

나는 무겁게 내려앉는 눈꺼풀을 치뜬 채 어둠 속을 더듬거리며 골목길을 내려간다. 성당 안에서 희미하게 새어나오는 불빛이 아주 정답다. 문득 가시 면류관을 쓴 예수님이 이 밤에 참 춥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그 흔한 누더기 한 벌 걸치지 못한 채 오들오들 떨고 계실 외로운 그 아저씨.

나는 늘 그렇듯이 오늘도 성당 안 뜰로 오르는 계단 끝에 앉아 술꾼 아버지를 기다린다. 아버지는 늘 술을 마시고 밤늦게 반 지하 단칸 사글셋방으로 돌아온다. 할머니는 아버지를 매섭게 쏘아보는 누나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버릇처럼 늘 말씀하신다.

"상우야, 아버지를 이해해라. 너희 아버진들 어디 마시고 싶어 마시겠느냐? 우리 식구 보기 미안해서 마시고, 집 나간 너희 엄마 미워서 마시고, 세상에 화가 나서 마시는 게지."

"난 커서 술 안 마실 거예요. 한 방울이라도 마시면 이 손가락에 장을 지질 거예요."

"상우야, 그래도 아버지가 있어야 집안에 중심이 잡힌다. 어서 아버지 마중 나가거라."

방금 전에도 그런 말씀을 하시며 할머니가 내 등을 어둠 속으로 떠밀지 않았는가. 자꾸만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으며 잠이 펑펑 쏟아진다. 어제도 할머니의 가래 끓는 기침소리에 새벽녘까지 눈을 붙이지 못한 탓이다.

고개를 탈래탈래 흔들며 저 아래 어둠 속을 뚫어질 듯이 바라본다. 잠 찌꺼기 몇 낱이 푸슬푸슬 떨어진다.

'어라, 저게 뭐지?'

나는 골목 입구의 어슴프레한 구석에서 흘깃 흘깃 움직이는 물체를 발견하고 몸을 일으킨다.

'또 술 취한 아버지가 쓰러져 주무시는 건 아닐까?'

어기적 어기적 그곳을 향해 걸어간다. 바람결에 술 냄새가 실려 오는 것으로 보아 아버지가 틀림이 없다. 아버지 혼자만이 아니었다. 웬 아저씨가 이쪽으로 등을 돌린 채 아버지를 내려다보고 있다. 아저씨는 윗옷을 벗어 아버지의 꽁꽁 언 몸을 덮어주고 있는 참이다.

"아저씨, 아저씬 누구세요?"

"…"

"누구시냐고 묻지 않습니까?"

아저씨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내려다본다. 나는 아저씨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만 그 자리에 얼어붙어버리고 만다. 아저씨는 머리 위에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있다. 가시 면류관 사이로 거무칙칙한 핏방울이 흘러내리고 있다.

"아저씬 예수님 아니세요?"

아저씨는 대답이 없이 그저 희미하게 웃고 있을 뿐이다. 눈발도 그 희미한 웃음을 비껴갈 뿐이다. 나는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머리를 탈래탈래 흔들어 본다. 호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고 허벅지를 꼬집어본다. 아프다. 그렇다면 분명 꿈은 아닌 듯하다.

"아저씨! 아저씬 분명 예수님 맞으시죠? 그런데 여긴 웬 일이세요?"

"…"

그래도 대답이 없다. 나는 몸을 웅크리고 아버지를 흔들어 깨운다. 아버지는 소매 끝으로 입술을 훔치며 두 눈을 게슴츠레 뜨고 올려다본다. 히죽 웃으며 내 손을 덥썩 잡는다.

"어, 상우! 우리 집 대, 대들보 상우님께서… 여, 여기까지 어인 행차십니까, 네?"

"아버지! 이분…아니 예수님께서 아버지가 얼어 죽을까봐 여기까지 어려운 걸음을 하셨단 말이에요."

"뭐, 예수님께서…?"

"이분이 안 보이세요?"

아버지는 게슴츠레한 눈을 부비며 주위를 한바퀴 휘둘러보다 푸시시 웃으며 말한다.

"이놈이 무슨 헛것을 본 모양이구나?"



나는 아저씨의 손을 잡는다. 따스한 온기가 손끝을 타고 전해 온다. 갑자기 온몸이 풍선처럼 가벼워져 허공으로 붕 뜨는 것만 같다. 아저씨의 손을 잡아 흔들며 떨리는 목소리로 갑자기 타박을 주기로 한다.

"정말 이분이 안 보이세요?"

"함박눈, 오 함박눈! 내 부끄러운 마음을 덮어주는 함박눈…이 자식이 배를 곯아 갑자기 눈에 헛것이 보이는 모양이야."

"정말 안 보이세요? 예수님, 예수 그리스도!"

나는 아버지를 부축하여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다. 가시 면류관을 쓴 아저씨는 몸을 돌려 성당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다. 함박눈은 기세 등등 펑펑 쏟아지기 시작한다. 금세 세상 모든 것을 덮어 버리겠다는 기세로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무너져 내리고 있다.

나는 행여 아저씨를 놓칠세라 아버지의 겨드랑이를 바투 쥐고 뒤쫓는다. 갑자기 골목 안쪽 어디선가 신음소리가 들려온다. 아버지를 털썩 눈밭에 버려 두고 골목 안쪽으로 내달린다.

골목 안쪽 한 구석에서 내 또래의 사내 아이 하나가 온몸을 움츠린 채 오들오들 떨고 있다. 가시 면류관의 아저씨는 넝마처럼 너덜너덜한 바지를 벗어 사내아이에게 손수 입혀주고 있다. 사내아이는 아저씨의 얼굴을 올려다 보다 말고 갑자기 비명을 내지르며 골목 바깥으로 튀어나간다.

소스락 소스락.

기세등등하던 눈발이 갑자기 한 풀 꺾인다.

"야, 상우야! 네놈이 지금 헛것을 본 모양이구나. 어서 이리 오지 못해!"

골목 바깥에서 아버지의 혀 꼬부라진 목소리가 들려온다. 가시 면류관의 아저씨는 아까보다 걸음을 빨리해 성당 계단을 오르고 있다. 아저씨가 문을 연다. 갑자기 눈부신 빛이 와락 쏟아져 나온다. 나는 그만 눈부신 빛에 정신을 잃고 잠시 비틀거린다.

나는 성당 안으로 뛰어 들어가 앞쪽을 바라본다. 아까 보았던 가시 면류관의 아저씨가 두 팔목에 못이 박힌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 아저씨의 가슴이 아직도 실룩거리고 있다. 걸음을 빨리 한 탓에 여태 숨이 가쁜 모양이다. 나는 성당 밖으로 걸어 나온다. 아버지가 내 어깨를 덥석 잡아 흔들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한다.

"상우야, 너 지금 제 정신이냐?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릴 하고 있어, 엉?"

"아버지! 세상엔 눈에 보이는 것만 있는 게 아니에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분명 있는 거예요. 아시겠어요?"

"아니, 이놈이… 갑자기 세상 다 산 사람처럼 말하네."

"아버지, 술 먹을 돈 있으면 그 돈, 할머니 약값에나 보태세요."

하느작 하느작.

봄도 아닌데 웬 나비 떼가 이렇게 기승을 부리는 것일까. 나는 아버지의 손목을 와락 움켜쥐며 무너져 내리는 함박눈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함박눈은 밤 내내 이어질 모양이다.

김문홍 소설가·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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