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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을 위한 동화 <28> 섬초롱꽃 필 때면

기다림이 작은 종소리로 알알이 맺히고…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07-01-18 19:15:16
  •  |   본지 3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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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오순환


"명옥아! 명옥아-!"

진아가 대문 앞에서 명옥이를 부르는 소리가 상수네 집까지 들렸다.

명옥이 집과 대문이 나란히 붙은 상수네 집 복실이가 진아 소리에 놀라 컹컹거리며 짖었다. 방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명옥이가 눈을 비비고 마당으로 나왔다.

"우리 학교에 놀러가자."

"누구랑 갈건대?"

"우리 둘이 가지 뭐."

끼룩 끼룩 멀리서 갈매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명옥이가 살고 있는 마을은 바닷가 작은 어촌마을이다. 동백나무 숲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는 키 작은 집들이 게딱지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 방학이라도 도시 아이들처럼 가야할 학원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학교에서 방학 때는 방과후 학교 공부가 있어도 매일 열리는 것이 아니라 학교는 텅텅 비어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명옥아, 눈 내릴 것 같지 않니?"

진아가 먼저 잔뜩 찌푸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첫눈이 내렸으면 좋겠다."

명옥이는 눈 내리는 것을 못 본지 벌써 몇 해가 된 것 같았다. 눈을 무척이나 기다리는 눈치였다. 둘은 손을 잡고 남해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골목길을 빠져나와 학교로 걸음을 옮겼다.

명옥이가 이곳에 전학 온 지 벌써 이태가 지났다. 명옥이가 살던 곳은 북한 땅 황해도였다.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와 함께 중국을 거쳐 남한으로 왔다. 그러나 아버지는 함께 오지 못했다. 식구들을 안전하게 보내주고 곧 뒤따라오신다던 아버지는 아직도 소식이 없다. 명옥이는 탈북자들이 모여 생활하는 '하나원'이란 곳에서 공부를 하며 지내다 이곳으로 옮겨왔다. 모든 것이 낯설기만 했다. 학교도, 넘쳐나는 자동차도, 친구들도…. 처음 전학 왔을 때만해도 아이들은 명옥이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싶어 했다. 북한은 어떤 곳인지, 어떻게 그 무서운 북한을 탈출했는지 물었다. 어떤 아이들은 불우이웃을 돕듯 명옥이에게 연필이나 공책 같은 학용품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하지만 북에서 온 아이라고 놀릴 때는 친구들이 얄밉기도 했다.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북한 생활에 대해 이야기 할 때면 반 아이들은 귀가 솔깃했다. 북한에는 학원도 없고, 컴퓨터나 TV가 없어 불편했지만 동네 아이들이 함께 어울려 놀 때가 많다는 이야기에서는 아이들도 부러워했다. 하루 종일 있어야 자동차 구경하기 힘들고, 또 먹을 게 모자라 배불리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긴 했지만, 명옥이는 아빠와 함께 살던 고향이 그리웠다. 봄이면 들판에 핀 예쁜 들꽃을 꺾어다 주시던 아빠!



학교 운동장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울타리에는 동백꽃이 벌써 꽃봉오리를 맺고 있었다. 마을 뒤 동백 숲 속에서는 동박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얘들아, 우리 축구 안 할래?"

상수가 축구공을 손에 들고 교문으로 들어섰다.

"셋이서 무슨 축구를 하니?"

"아이들 더 불러 모으면 되잖니?"

"피이-, 너나 많이 해."

명옥이와 진아는 관심 없다는 듯이 교무실 앞 화단으로 향했다. 화단에는 겨울이라 꽃들이 시들어 있었지만 들꽃 이름이 적힌 팻말은 오롯이 남겨져 있었다. 지난해 새로 부임해 오신 교장 선생님께서 가꾸어 놓으신 꽃밭이다. 방가지똥, 뽀리뱅이는 양지바른 곳에서는 벌써 잎에 생기가 돋았는데 민들레, 나리꽃, 각시붓꽃, 꽃무릇, 까마중, 섬초롱꽃은 줄기가 말라있었다. 마치 야생화 밭을 학교에 옮겨 놓은 듯했다. 화단 옆 작은 연못에는 나사말, 검정말, 수련, 부들, 부레옥잠 같은 물 속에 사는 식물들을 심어 놓으셨다. 그 중에서 명옥이의 발길을 멎게 한 것은 '섬초롱꽃'이라 써놓은 팻말 앞이었다. '아, 내가 살던 고향에도 섬초롱꽃이 많이 피었는데…….'

고향에 있을 때 아버지가 들려주셨던 섬초롱꽃 이야기가 생각났다.

명옥이는 양지바른 화단가 벤치에 앉아 진아에게 아버지한테서 들었던 섬초롱꽃 이야기를 해 주었다.

"옛날 종지기 노인이 있었는데, 젊었을 때 싸움터에서 무릎을 다친 노인은 종지기가 되어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때에 맞춰 종을 쳤단다. 집나간 아들을 기다리며 종을 쳤지. 그 시간이 어찌나 정확했는지 사람들은 종소리를 듣고 잠을 깨고 밥을 먹고 일을 했단다. 노인은 아들을 기다리다 지치고, 나이가 많아 종을 더 이상 칠 수가 없게 되었지. 마지막 종소리가 온 마을에 울려 퍼지는 날 노인의 눈에서는 참았던 눈물이 마구 흘렀어. 그러나 노인은 그만 발을 헛디뎌 종각 아래로 떨어져 죽고 말았대. 얼마 뒤 그 자리에 종 모양의 초롱꽃이 피었는데 그 이름이 섬초롱꽃이란다."

꽃 이야기를 해주는 명옥이 눈가에는 이슬이 맺혔다. 아빠에 대한 그리움이 새록새록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명옥아, 네 아빠는 꼭 약속을 지키실 거야. 따뜻한 봄이 되면 오시겠지?"

진아는 명옥이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아빤 들꽃을 좋아하셨는데, 고향 마을 앞 바닷가에 많이 핀 섬초롱꽃을 무척이나……."

명옥이는 더 이상 말꼬리를 잇지 못했다.

"내년 여름 화단에 심어 놓은 섬초롱꽃이 많이 피겠지. 그러면 아빠가 꼭 오실거야."

진아는 명옥이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고마워, 진아야."

그 때였다. 현관문이 열리면서 교장선생님께서 밖으로 나오셨다.

"명옥이, 진아 왔구나."

"네, 교장선생님. 안녕하세요?"

"오냐, 너희들 방학인데 어쩐 일이야?"

교장선생님은 화단에 심어놓은 들꽃에 짚단을 풀어 덮으셨다.

"심심해서 학교에 놀러 왔다가 혹시 섬초롱꽃 새싹이 돋았나 하구요."

"이 녀석들 성질도 급하기도 해라. 벌써 봄이라도 온 줄 아는구나. 그래 명옥이 아빤 아직 소식이 없니?"

"네, 전화도 편지도 할 수 없나 봐요."

마을 앞 방파제에는 초롱꽃처럼 대롱대롱 집어등을 매단 오징어잡이 배들이 한가롭게 낮잠을 자고 있었다.



학교 울타리 탱자나무 가지가 하얀 꽃망울을 맺은 오월. 아빠한테서 기다리고 기다리던 반가운 소식이 왔다. 그동안 감시가 심해서 탈출이 어려웠는데, 꽁꽁 얼어붙은 강물이 풀리면서 압록강을 넘어 중국 땅에 와있노라고. 섬초롱꽃이 피기만을 기다리던 명옥이는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하루 빨리 아빠가 그리운 가족 품으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림이 작은 종소리로 알알이 맺힌 섬초롱꽃이 예쁜 꽃망울을 터뜨렸다.

이장호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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