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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을 위한 동화 <31> 장모님의 샘

사람은 간데 없어도 샘물 맛은 예전 그대로인가 보네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07-02-08 17:30:06
  •  |   본지 3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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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오순환


자네, 청도를 간다고?

갑자기 변덕을 부린 영하의 날씨에 어떻게 지내시는가 문안 차 들렀더니 장모님은 대뜸 물었습니다.

어찌 아셨습니까?

내 귀는 세월이 흐를수록 천리 밖까지 밝게 열리네.

좋은 현상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연세가 되면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눈도 침침하고 귀도 잘 들리지 않는다는데 말입니다.

그만한 이유가 있겠재. 청도에 가거들랑 그 집을 한번 찾아봐 주게.

그 집이라니요?

알잖는가. 샘 깊은 내 친정집. 내가 어린 시절을 따뜻하게 지냈던 집이네.

아, 예. 찾아보도록 하지요. 헌데, 지금 누가 살고 있습니까?

나도 모르겠네. 소식이 하도 오래라서….

장모님은 금방 당신이 낳고 자란 고향집을 눈앞에 그리며 말끝을 흐렸습니다. 그러한 장모님을 뒤로하고 이 서방은 그 길로 청도로 향하였습니다. 한 시간 남짓한 기찻길은 영하의 날씨인데도 여행하기에 알맞는 거리였습니다. 청도에 들어섰을 때는 가까운 산봉우리에 잔설이 희끗거렸습니다. 이 서방은 비로소 겨울다운 운치를 맛보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서방이 뿌리내리고 있는 부산은 겨울 내내 흰나비처럼 사뿐거리는 눈 구경하기가 쉽지 않은 터였습니다. 청도에서 일을 다 보고 났을 때는 시간이 상당히 남았습니다. 이 서방은 거래처 사장의 친절에 힘입어 오랜만에 적천사를 돌아보고, 장모님의 옛집을 둘러보았습니다. 적천사만 해도 운문사와 더불어 그 역사가 아득한데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가파르고 비좁은 길을 오르니 발 밑에 잔설이 밟히고, 겨울 청정한 산 기운이 이마를 싸늘하게 비질하였습니다. 숨죽은 듯 위엄을 도사리고 있는 산사는 한마디로 고불(古佛)을 연상케 하였습니다. 이 서방은 경건한 마음으로 합장 배례하고, 부산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장모님을 찾아 뵈었습니다.

금새 다녀왔는가?

장모님은 반겨 맞았습니다.

여유가 좀 있어 두루 구경하였습니다. 이거 받으십시오. 청도 선물입니다.

이건 벌집 아닌가?

장모님은 뜨악한 얼굴을 하였습니다.

적천사 은행나무에서 따왔습니다.

적천사 은행나무! 오 백 년도 더 나잇살을 묵은 은행나무지. 그 둘레만해도 장정 다섯이 깍지를 끼고 안을 만큼 우람하지러.

아직도 가지를 치며 하늘을 치받들고 있습디다.

은행도 엄청 많이 열린다네. 우리 소싯적 가을이면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며, 은행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치마폭에 주워 담았네. 그 은행나무가 눈앞에 선하게 다가오네.

언제 제가 한번 모시겠습니다.

가을이 되면 은행나무에 벌집도 많이 매달렸네. 자칫 잘못 건드리면 성난 벌떼들이 새까맣게 덮쳐 혹부리 아이들이 되고는 하였네. 정말 자네다운 선물이네. 우리 옛집은 어떻던가?

장모님은 적천사 아름드리 은행나무에 기대어 추억에 흠뻑 젖어 있다가 옛집을 떠올렸습니다.

버려진 집처럼 웅크리고 있습디다. 이웃 노인네 말로는 일년에 한 두 번 대구에서 누군가 찾아본다고 합디다만….

아매도 내 오라버니 손녀딸인 듯 싶네. 친정 조카가 대를 이을 아들 생산을 못하였네. 샘은 그대로 있고?

두레박을 한참 내리뜨리고서야 겨우 물을 길어 올렸습니다. 물맛이 왜 그리 짭니까? 이게 그 샘물입니다.

이 서방은 가방에서 생수 병에 담아온 샘물을 장모님의 두 번째 선물로 내놓았습니다.

사람은 간데 없어도 샘물 맛은 예전 그대로인가 보네.

물병을 받아든 장모님의 눈자위가 어느 사이에 촉촉이 젖어 있었습니다.

한번 맛 보시죠.

옛날에는 이 샘물로 양치질을 하고 입을 헹구었네. 숙취로 냄새가 나는 입안을 말끔히 씻어 주었네.

천연소금이군요.

그렇네. 어느 해 가뭄이 들어 증조 할아버지께서 샘을 팠는데, 물이 샘솟지 않아 자꾸자꾸 파내려 갔다네. 사람의 모습이 까마득히 보이지 않을 즈음 물줄기가 솟구쳐 올랐는데, 물맛이 짜더라네. 그만 허탈한 마음으로 샘을 다시 메우려고 하자 그날 밤 꿈에 하얀 노인네가 나타나 그대로 사용하라고 하더라네.

산신령께서 점지해 주셨군요.

그것까지는 모르겠네만, 샘을 판 수고도 아깝고, 워낙 날이 가문 탓에 짠물이 고여난 것이라고 생각을 되돌렸네. 그런데 홍수가 나고 가뭄이 해갈되었는데도 여전히 샘물은 소금 맛이었네.

그 맛을 대를 이어 사용하지 않았습니까.

사용하는 정도가 아니었네. 차츰 인식을 달리하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샘으로 사랑을 한 몸에 받았네.

장모님은 가져온 샘물을 한 컵 부어 맛 좋게 입안을 헹구었습니다. 그 모습 한편에 샘물에 대한 깊은 사랑과 깊이 모를 자랑스러움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 서방은 장모님의 그런 모습을 일찍이 보지 못하였습니다.

물맛이 예전 그 맛입니까?

정말 내가 처녀시절로 돌아간 듯 싶네. 샘가에서 마을 아낙네들이 왁자하게 떠들며 웃음꽃을 피우던 때가 그립게 다가오네.

짠물로 무얼 하였기에 왁자하였습니까? 빨래는 할 수 없었을 테고, 입안이나 헹구자고 샘가에 몰려들지는 않았을 게고….

자네는 천혜의 바다를 끼고 살아왔으니까 모를 법도 하지. 무엇보다 소금이 귀한 산골 아닌가. 그때만 해도 소금 한 됫박을 사자면 먼 거리의 읍내 장까지 나가야 했고, 값 또한 얼마나 비쌌는가. 그래서 소금이라 이름하지 않았는가. 자네 말처럼 그야말로 천연소금 역할을 한 거네.

이제야 짐작이 갑니다.

김장철이 돌아오면 우리집 마당은 아예 동네 김장터가 되었네. 바리바리 배추와 무우를 실어와 샘물로 김장을 씻고 절였네. 마당 가득 덕석을 펴놓고서 서로서로 손맛을 보아가며 김장을 나르는 광경을 떠올려 보게.

김장김치 맛이 기가 막혔겠습니다. 말만 들어도 입안에 신물이 고입니다.

한겨울 김장김치 맛은 그 어느 맛보다 사근하였네. 이웃 사람들도 다투어 샘물을 길어갔네. 샘물의 용도는 거기에 그치지 않았네. 땅 속에서 솟아난 천연소금 맛이라는 소문이 돌자 그 영험함을 믿고서 읍내에서까지 샘물을 길어갔네. 산후조리에 쓰이는 미역국을 끓이는데도 우리집 샘물로 간을 맞추었고, 잔치집 음식맛이며, 된장 간장을 담글 때도 우리 샘물을 필요로 하였네. 생선찌개, 나물무침, 된장국은 물론이고, 쇠죽을 끓일 때도 소의 건강을 위해 이 샘물을 넣었네. 그뿐만 아니었네. 가려움증이나 부스럼도 다스려 그 물로 몸을 씻고 헹구었네.

정말 신령스러운 샘물입니다.

이 서방은 새삼 자연이 주는 은혜로움과 조화를 실감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고, 그와 함께 샘물이 말없이 버려지다니,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네.

장모님은 생수 병의 샘물을 소중한 보물처럼 가슴에 안았습니다.

어디 장모님의 마당 깊은 집의 샘물뿐입니까. 도시의 울안에서 자연의 베품을 우리 모두 망각하고 있지요. 어쨌거나, 장모님께서는 이 짠 샘물의 은혜를 입어 건강하십니다. 귀도 천리 밖까지 열리고, 눈도 밝고, 이도 튼튼하시고….

이 서방은 장모님이 어느 날 옛집을 찾아가리라 예감하였습니다.

정형남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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