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초 영도에 있는 신선성당에 부임하면서 순교자현양위원으로 임명되었고, 이어 이듬해에는 위원장을 맡았다. 사회에서는 이해가 잘 되지 않겠지만 교회에서 어떤 직책에 임명을 했다고 해서 별도의 지원이나 지도를 하지 않는다. 새롭게 직책을 맡은 사람이 알아서 꾸려 나가야 한다.

200여 년밖에 되지 않은 우리나라 순교사에 대한 연구지만 관계 고문서를 뒤적이고 현장 확인을 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국사편찬위원회나 여러 대학의 연구소 등과의 교류도 필요하다. 교회 밖에서 순교자현양회란 명칭이 생경해서 어려움이 따르기에 교회사연구소로 이름을 바꿔 교류의 편익을 도모해야 했다. 초기의 우리나라 교회는 중국 북경과 관련이 많은데, 20년 전에는 북경 통행이 어려워서 대만의 보인대학 연구소를 이용했다. 유럽에 소장되어 있는 자료는 그 지역에서 공부하고 있는 신부들의 협조를 받았다.

연구소 초창기에는 일본 도쿄의 상지대학 크리스천연구소와 교류가 잦았는데, 그곳에 수장된 자료들을 보면서 우리와 문화의 차이를 실감했다. 예컨대 16세기 말, 임진왜란 당시 일본 열도에 머물렀던 52명의 예수회 선교사들은 이탈리아와 스페인 그리고 포르투갈 출신들이었다. 네덜란드는 일본이 서양과 처음 접촉한 나라로, 나가사키 등 남쪽 지방에서는 네덜란드 문화를 학문화하기도 했다. 크리스천연구소는 유럽이 갖고 있는 일본과 서양의 관계에 대한 문서들을 모조리 마이크로필름으로 소장하고 있었고, 특별히 일본 교회와 관련된 부분은 인쇄해서 보관하고 있었다.

그 중 임진왜란 부분을 찾아 보니, 포르투갈 출신의 한 신부가 "참으로 불필요하고 무익한 전쟁"이라고 하며 부산성 전투를 "정말 아름다운 전장이었다"고 고향의 부모에 보낸 편지에 기록한 것이 전해지고 있다. 전장의 모습을 아름답다고 표현한 것은 부산성에서 군·관·민이 합세하여 최후의 1인까지 산화한 것을 묘사해 놓은 장면이었다. 글을 쓴 신부가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전황을 종합하여 교황청으로, 로마의 수도회 본부로,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등에 기록으로 남겼다.

지난 1988년 출범한 부산교회사연구소가 20년이 지난 지금 고전 번역·출간, 학술발표회 등 체계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사진은 교회사연구소 현판식(위)과 지난달 8일 가톨릭회관에서 열린 학술발표회 모습.

아무튼 임진왜란을 틈타서 예수회원 한 명이 1592년 12월에 진해 웅천에 상륙할 수 있었다. 그는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로 스페인 마드리드 시장의 아들이었다. 당시 전쟁은 소강 상태로 왜군은 울산에서 순천만에 걸친 남해안의 18개 성에 머물러 있었다. 이순신 장군에게 제해권을 빼앗긴 그들로서는 보급난과 조선 민병들의 항전에다 역질까지 번져서 군기가 무너져 있었다.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본국에 있는 예수회 책임자에게 지도신부 한 명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고 세스페데스 신부가 차출되었다. 왜군들 편에서는 사기 진작의 수단이었지만 예수회로서는 조선반도에 선교의 계기를 잡을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서양 신부가 진중에 있다는 것은 왜군으로서는 군기 위반이므로 엄하게 주의를 기울였지만 결국 알려지게 되고 경쟁관계에 있던 울산성의 구로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고자질하게 될 기미가 보이자, 고니시는 신부를 서둘러서 귀국시키고 만다. 그때가 1593년 정월이었다. 세스페데스 신부는 웅천에 머물면서 왜군 신도들에게 교리교육과 성사를 집전했다. 하지만 그가 조선의 토착민들과 접촉했는지 여부에 관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 이전의 예수회의 기록들을 보면 우리 민족을 독일계로 인식하기도 했으며 체격이 일본인들보다 크고 피부가 하얗다고 했다. 예수회에서는 조선반도에 포교를 위해 네 번이나 선교사를 파견했지만 쇄국의 장벽을 뚫지는 못했다고 한다. 이러한 부분을 확인하는 것도 부산교회사연구소의 과제이다. 1992년에는 세스페데스 신부가 태어난 마을의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찾아 세스페데스의 웅천 상륙 400주년을 기념하여 진해 사도소공원에 기념 조형물을 세웠다.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전사(戰史)는 잘 기록된다. 우리도 임진왜란에 대한 기록이 적지 않지만 일본은 더 상세하게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일본에서 포교하던 신부들이 남긴 기록은 당사자가 아닌 제3국인의 객관적인 시각일 수도 있다. 나는 이러한 문서들을 뒤적거리며 우리도 인문학에 더 많은 투자가 필요함을 절감했다. 우리 역사의 얼마나 많은 분량이 서양 등 다른 나라의 고문서 창고에서 잠자고 있을까.

교회사연구소의 과제 중 하나는 순교자들을 찾아서 현양하고 그들의 신앙을 우리의 삶에 현창(顯彰)되도록 하는 것이다. 조선 말기 100여 년간의 천주교 박해사는 소위 선참후계, 먼저 처형하고 후에 보고하는 방법이었으니 기록은 고사하고 증언마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1만 명 정도의 신도가 순교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제대로 정리된 분은 1984년 여의도에서 시성(諡聖)된 103명에 불과하다.

지금은 8곳에 교회사연구소가 있고 체계적으로 전공을 한 신부들과 소장 학자들도 많다. 그들의 노력으로 100여 분의 시성이 추가로 준비되고 있는 것을 보면 희망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교회 측의 관심은 여전히 냉담한 편이다. 베트남이나 일본도 우리와 비슷한 수난을 겪었지만 그들은 더 많은 순교자들을 발굴하고 정리하여 시성하고 있지 않은가.

교회사 연구는 단순히 교회의 일만은 아니다. 이 땅에서 있었던 일이고 바로 우리들의 선조들이 겪었던 일이니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다. 각 부문의 역사가 종합되면 그것이 바로 우리나라 역사가 아닌가. 교회사만이 아니라 각 단체, 지방마다 제 역사를 바르게 정리하는 일은 우리 후손에게 값진 유산을 남기는 것이다.

부산교회사연구소도 한정된 지역의 교회사여서 간단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큰 일이나 작은 일이나 일의 가짓수는 마찬가지다. 어설프게 시작했고 제대로 체계를 잡아 연구하지도 못했지만 근 20년간 어물거리다가 교회사를 제대로 전공한 든든한 후배에게 인계했다. 지금은 고전을 번역 출간함은 물론 학술발표만도 내달이면 60회에 이르는 등 아주 체계적으로 순교사를 정리하고 있다.

사회에는 다양한 과제들이 있고, 다 나름대로 중요한 일들이어서 선후나 우열을 가리기는 어렵지만 그런 중에도 기본이 되는 것을 우선해야 한다. 역사 연구는 우리의 뿌리를 확인하는 것이요, 미래에 나아갈 길의 나침반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