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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문학기행 <86> 소설가 천승세와 목포

시대와 맞서 싸운 文士 어머니처럼 품어준 목포, 그 안에 흐르는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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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천승세(앞줄 왼쪽에서 세번째) 씨와 신문학기행 독자들이 목포시의 명물 갓바위 앞 바다 위 산책로를 거닐고 있다.
부산에서 남해안을 따라 수평으로 서해 끝까지 가면 목포가 나온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 그 시절 그 목포는 아니지만 목포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고 목포는 항구다. 부산도 항구다. 왠지 쉽게 친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남도 풍류 남다르다더니. 목포시 용해동 목포문학관 앞에 서자 과연 풍광이 색다르다. 용해동 바닷가 넓은 터에 남농기념관, 문화예술회관, 목포생활도자박물관, 목포자연사박물관, 국립해양유물전시관 그리고 목포문학관이 모두 모여 있다. 남농기념관을 구경하고 나오다 탁 하고 엎어지면 앗 하고 코 앞에 목포문학관 정문이 있는 식이다.

"목포가 문학도시예요. 극예술 선구자 김우진, 한국 최초 여성 소설가 박화성, 사실주의 연극을 완성한 극작가 차범석, 소설가 천승세, 시인 김지하 최하림 , 문학평론가 김현이 나온 곳입니다." 마중을 나온 목포작가회의 김성호 지부장의 차분한 설명엔 은근한 자부심이 묻어 있다.

그 중 소설가 천승세(70). 부산의 문학기행 일행을 지난 17일 목포까지 불러들인 이름이다. 천승세의 소설은 팽팽하다. 그 팽팽한 힘이 무시무시한, 사실상 적이 없는 '시간의 식성'을 견뎌내기 때문인지 1958년 등단한 그의 소설은 지금 펼쳐도 쨍쨍한 기가 느껴진다. 1970년대 발표한 단편 '황구의 비명'은 주한미군 기지촌 여성의 수난사를 그린 작품이다. 선악, 피아의 대립구조가 워낙 명백하기 때문에 문학적으로 형상화해내기가 외려 어렵고 지나치게 전형적인 작품이 될 위험성마저 안고 있는 주제다. 그런데도 소설 말미 "황구는 황구끼리"라는 외침이 뇌리에 박히며 잊히기 힘든 한국의 단편으로 남아있는 것부터 그의 뿌리깊은 내공에 궁금증을 불러 일으킨다.

역시 1970년대 작품인 '낙월도'. 목포 근처 섬사람들의 신산한 삶을 그려낸 이 중편에는 '곡식'이라는 낱말이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지독한 가난에서 출발하고 거기서 끝나는 이 비현실적일 정도로 절절한 소설에 왜 가난한 이들의 전부인 곡식이란 말이 안나올까. 전부 '곡기'라는 말로 대체돼 있기 때문이다. '곡식'과 '곡기'는 엄연히 다르다. 곡식이 없거나 모자라 겨우 연명할 만큼의 곡식의 대체품이 곡기 아닌가. 이 생생하고 아픈 소설 또한 팽팽하고 아름답다. 문학평론가 백낙청은 이에 대해 '천승세의 성공적인 작품들은 모두 소설의 이러한 기본기에 의지하고 있다'고 평론에서 밝힌 바 있다.


■ "갓바위는 나를 품어준 곳, 내 문학의 요람"

그 기본기와 삭지 않는 문학 열정이 싹튼 곳이 바로 천승세의 고향 목포다. 그의 어머니는 '한국 최초 여류 소설가' 목포 태생의 박화성이다. 목포문학관에는 '박화성관'이 따로 있다. "나는 낙제권을 맴도는 학생이었소. 어머니께서 글 쓰시는 것 보면 존경스럽기도 했지만 어린 나이에 궁상스럽다 느끼기도 했을 만큼 힘들어 보여 글쓸 생각은 아예 하질 않았지." 청소년 시절부터 시작한 가라데를 그는 14년 수련했다. 4단이다. "상대의 힘줄을 뽑는 발색, 통증은 크지만 신체에 큰 지장은 주지 않는 곳만 공격하는 자비를 베푼다는 뜻의 자은(慈恩), 제비처럼 날아 담장 같은 장애물을 뛰어넘는 연비(燕飛) 같은 기술이 특기였거든. 목포 시내의 깡패였지. 특기는 싸움." 그의 주먹을 보았다. 뭔가 '때려잡는' 용으로 개발된 무기처럼 크고 뭉툭했다. 칼로 깎아내야만 했다는 굳은살 자국이 역력했다.

천승세는 군부 독재 시절 민족문학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장을 지냈다. 이때 그는 민주화운동의 현장에서 숱한 일화를 남겼다. 이미 1970년대에 "'황구의 비명' 썼더니 반미작가라고 독재정권에게 잡혀가 곤욕을 치르고, '포대령'을 발표하고는 감히 대령이라는 호칭을 명예롭지 못하게 썼다고 끌려가고, '낙월도'를 썼더니 '이렇게 국운이 융성해가는 박정희 대통령 치하에서 떨어질 낙(落) 자를 썼다고 잡혀가 죽을 뻔하고, 그뒤 군대 이야기를 쓴 '삭풍'을 냈더니 '이놈, 이번엔 진짜로 죽여야겠다'고 달려든" 세월을 거친 그였다. 예술의 진정성과 예술가의 자유혼에 대한 갈망이 누구보다 컸던 상태로 민주화운동 시절을 맞이했기에 그는 자유문학운동의 일선으로 박차고 나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문사(文士)들은 왜 그렇게 약한가. 창백하고 잘 휘청거리고. 남자가 너무 약하면 어쩔 수 없이 비겁해지게 돼 있지 않소. 나는 문무를 겸비해야 한다고 생각했지." 목포문학관의 박화성관에서 그가 말을 이었다. "그렇게 해서 무(武)는 어느 정도 성공한 것 같아요. 근데 문(文)은 50년 허송세월만 했지."

목포의 명소인 해안절벽 갓바위를 보러 갔을 때였다. 지금은 바다 위에서 갓바위를 감상할 수 있도록 바다 위에 나무데크로 짠 길을 내놓았다. "저 갓바위에 자주 갔소. 저기서 낚시도 하고 지나다니는 배를 하루종일 쳐다보기도 하고 연애도 했지. (까마득해 보이는)삼학도에서 갓바위까지 헤엄쳐와 해바라기도 하고. 우린 그때 물개였지. 짐승처럼 헤엄을 잘 쳤소. 요즘 하는 수영은 왠지 어항 속에서 훈련받은 '사람'들이 하는 것 같아." 그러던 갓바위 앞에서 그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저기서 정처 없이 다니는 배들을 보며 비로소 문학을 생각했소. 내 청년시절을 유일하게 품어준 자리지.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주위도 많이 변했지만 저 갓바위는 그대로지. 내 문학청년 시절의 요람이 바로 저 갓바위요." 이어진 말이었다.

갓바위가 '문청' 천승세를 품어주었다 해도 그에게 문학의 출발은 어머니 박화성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글을 끄적거리고 있으면 좋아하지 않으셨소. 어머니는 정말 존경하는 분이오. 그 어떤 남정네도, 조선시대의 여인도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시절을 그리 의연하게 보낼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할 만큼. 평생 정결한 부덕(婦德)과 검약으로 살았고 글을 쓰실 때도 '나는 내 자식을 쓴다' '문학에 완성이란 없다'고 하셨지. 어머니는 세상에 알려져 있는 것보다 위대한 소설가라고 생각하오." 1939년 목포에서 태어난 천승세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옮기지만, 박화성의 문학 자체가 목포를 중심으로 한 남도 일대를 주요 배경으로 삼고 있고 천승세 또한 목포 일원 바닷가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썼기에 모자에게 목포는 특별하다.


■ 어머니, 가난, 천상병 그리고 신인의 마음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문학 유전자와 꼿꼿한 정신과 몸은 그에게 '고집과 지독한 가난'을 새긴다. "서울 살 때 영등포 근처로만 서른 아홉 번 이사를 하며 셋방살이를 했소. 어머니께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거든. 단칸방에 책상이 없어 포개놓은 이불 위에서 밤에 글을 썼소. 자식을 다섯 두었는데 이틀 굶는 건 예사였지." 그리고 천상병. "문인이란 사람들이 위급할 땐 더 표가 나더란 말요. 가난했던 천상병 시인에게 용돈 주고 술 사주던 문인들이 그가 연루된 동백림사건이 터지자 싹 돌아섰지. 평소 친했던 천상병 시인이 '믿을 건 천승세'라 생각했는지 우이동 우리 셋방에 와서 9개월 함께 살았지." 그는 "빨리 천상병 평전을 완성해야 할 텐데"라고 했다. 출판사까지 정해놓고도 몇 년째 평전 쓰는 일이 미뤄지는 것을 스스로 안타까워 했다. 그러더니 생각났다는 듯 "천상병 박재삼 이형기…친했던 친구들이 경상도 사람이 많아요. 경상도 사람들 처음엔 관계 트기 어렵지만 한번 맺어지면 잘 변하지 않거든" 하고 말했다.

유달산을 오르면서 작가는 "오늘 날씨가 흐려서…흐려서" 하고 혼잣말을 했다. 유달산 조망이 좋은데 구름이 끼면 그게 가려져 부산 손님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유달산 정자에서 그가 들려준 말을 곱씹어보면서, 풍광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렇게 수컷으로 태어나 수컷처럼 살고 그렇게 죽는 게 좋소." 비겁하지 않게 시대와 당당히 맞서고 소설로 낮은 사람을 보듬은 일생이 그 말에 겹쳐졌다. "내일 죽더라도 오늘 저녁에 '내일 다시 신인으로 태어날 수 있다'는 꿈만 꿀 수 있다면 나는 행복하오. 그게 소원이오. 요즘도 어떻게 하면 신인이 될 수 있나 고민을 하지. 작품집 좀 내고 일가를 이룬 양 하는 가짜 문인이 너무 많아. 문학에서 어떻게 일가를 이룬다는 말인가. 죽어도 문학은 완성할 수 없는 것이오. 나는 신인으로 죽고 싶소." 그가 기념비적 희곡 '만선'을 남긴 것도, 1989년 늦깍이로 시인 등단을 한 것도 그런 '신인 정신'의 실천이었던 셈이다. 혼탁해져가는 문단에서 신인의 꿈을 꾸는 칠순 작가를 만난 것, '목포의 충격'이었다.

그가 목포에 돌아와 살기 시작한 지 6년이 흘렀다. 그는 강건했다. "담배? 하루에 3갑쯤 피우지. 삶의 즐거움이오. 지나친 흡연은 건강에 해롭다고. 나는 이렇게 말하지. 지나친 건강은 흡연에 해로운 거야! 의학박사 후배들이 나더러 '선배님 건강체질은 이해가 잘 안돼요. 돌아가시면 혹시 해부를 좀 해봐도 될까요?' 그래. 썩을 놈들이.(웃음)" 그의 강건함이 신인정신에서 나온 것이고, 또 결국 그 신인정신을 충전하는 것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목포에서 보았다. 신선하고 힘이 나는 광경이었다.


◆ 천승세 작가는

갓바위에 얽힌 사연을 들려주는 천승세 작가.
천승세 작가는 1939년 한국 최초 여성 소설가 박화성의 아들로 목포에서 태어났다.

195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점례와 소'로 당선되면서 등단했고 희곡 '만선'으로 제1회 한국연극영화예술상을 받았다. '황구의 비명' '신궁' '감루연습' 등 작품집과 장편 '사계의 후조' '낙과를 줍는 기린' 등을 남겼고 많은 콩트와 에세이를 썼다.

만해문학상, 성옥문화상 예술부문 본상, 자유문학상 본상 등을 수상했다.


신문학기행 참가 문의=부산문화연구회 (051)441-0485 동보서적 803-8000 www.문학기행.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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