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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복도로 리포트 <2-상> 산복도로의 풍경과 기억 : 산복도로 고개

애환 담긴 산복도로 고개

구불구불 그 길위로 오늘도 시대의 기억이 새롭게 새겨진다

  • 배재한 기자 myway@kookje.co.kr
  •  |   입력 : 2010-01-04 20:18:45
  •  |   본지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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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역사의 질곡 품은 영선·대티·까치·성북 등 산복도로 위 고갯길들
- 꼭두새벽 도시락 들고 일터 나갔던 가장들이 해질녘 쌀과 연탄 팔아 뚜벅뚜벅 넘었던 길
- 삶의 희로애락 고스란히 담고있는 무궁무진 스토리 창고

부산의 산복도로에는 고개가 있다. 고개에 얽힌 이야기를 듣다 보면 때론 웃음이 묻어나기도 하고 또 때론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한다. 산복도로 고개에는 한(恨)이 깃들어 있다. 산복도로 아래 일터에서 힘든 노동을 마친 가장이 고단한 몸을 이끌고 가족들이 기다리던 보금자리를 향해 힘겹게 넘던 고개였다. 이들 고개에는 역사가 있고 문화가 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근대화의 흔적이 배여 있기 때문이다. 산복도로를 더 산복도로 답게 하는 고개 속으로 들어가보자.

■부산엔 영선고개가 두 개?

   
1910년대 부산 중구 영선고개 위쪽 모습. 오른쪽이 영선산이다.
부산의 그 많은 고개 가운데서도 근대화의 물결에 가장 많이 시달린 곳이 영선고개였다. 어쩌면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파란만장했던 역사의 주 무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산 중구 영주동 부산터널 입구 삼거리~코모도호텔 앞~메리놀병원 앞~국제시장 입구를 오늘날 영선고개라고 부산 중구가 표지판까지 붙여놓고 홈페이지에도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이 고개는 영선고개가 아니다. 이 고갯길은 한국전쟁 때 상륙한 유엔군이 부산에서 처음으로 아스팔트 길로 포장해 '부산 아스팔트 도로 1호'가 됐다. 그래서 유엔도로 또는 유엔고개라고 불렸다.

옛날부터 영선고개라고 불렸던 곳은 영주동 재래시장 입구~ 부원아파트와 40계단 위를 지나가는 좁은 고개이다. 요즘은 '인쇄골목 2길'이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다. 부산불교역사연구소 김한근 소장은 "현재 영선고개라고 표지판이 붙은 길에 다른 지명을 붙이고 진짜 영선고개의 지명을 되찾아 그 역사와 가치를 복원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 중구는 현재의 영선고개를 올 연말께 '중구로'로 고쳐 부를 예정이다.

   
부산 서구 동대신동에서 중구 영주동 방향으로 부산터널을 빠져나온 뒤 만나게 되는 부산터널 3거리. 영선고개라는 표지판이 보이는 고개는 실제 '유엔고개' 또는 '유엔거리'로 올 연말께 '중구로'로 이름이 바뀔 예정이다. 박수현 기자 parksh@kookje.co.kr
영선고개는 영선산을 깎아 평평하게 고르는 착평공사(1909~1912) 때 헐려 없어진 영선산 등성이를 가로지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산 이름을 따서 붙인 고개 이름이다. 지금은 없어진 영선산은 건축물을 신축 또는 수선하는 일을 말하는 영선에서 나왔다고 한다. 1676년 '초량왜관'을 짓고, 그 왜관을 고치기 위해 사람과 물자가 지금의 초량 쪽으로 오고갔다. 그 때마다 영선고개를 넘어야 했다. 영선고개를 넘나드는 고갯길은 '초량왜관' 시절까지만 하더라도 대낮에조차 혼자서는 좀처럼 나다닐 수 없던 소름끼치는 오솔길이었다고 한다. 그 무렵 사람들이 영선고개 오솔길을 넘나들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은 초량왜관 객사(客舍)와 임소(任所)가 있던 영주동에서 초량왜관 사이를 오가는 길이 바로 이 고갯길뿐이었기 때문이다.

■대티고개는 까치고개로 연결

   
까치고개 표지석
서구 서대신동과 사하구 괴정동을 오가는 고개가 대티고개다. 오늘날 대신동을 과거 대치벌이라고 부른 데서 연유했다. 꼬불꼬불하고 경사가 급해 넘기 힘든 고갯마루를 막 지나자마자 분뇨처리장이 자리잡고 있었기에 혐오·낙후의 대명사처럼 외면당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1971년 대티터널이 준공되고, 그 아래로 1994년 6월 지하철 1호선이 달리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대티고개는 부산의 서부로 가는 길목이다. 고개 너머에는 부산의 신성장 동력인 서부산권이 꿈틀거리고 있다. 동북아 허브항만인 부산신항과 녹산국가산단,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 부산과학산업단지가 있다. 부산의 미래 100년을 짊어질 신천지인 서부산권이 고개 너머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대티고개는 고갯마루에서 서구 아미동과 사하구 괴정동을 잇는 까치고개와 연결된다.

까치고개는 아미산 자락에 밤나무가 울창하고, 무성한 숲과 송림이 우거져 까치가 많이 서식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1970년대 오솔길과 같았던 까치고개가 확장되었으며, 1993년 아미동 쪽에서 괴정동 쪽으로 포장도로가 뚫려 현재 서구와 사하구를 잇는 우회도로로 활용되고 있다. 이 까치고개는 중간 지점에서 사하구 감천동 태극도 마을과 감천항으로 이어진다.

까치고개에서 25년째 '까치건재철물점'을 운영하는 김판기(59·부산 서구 아미동) 씨는 "1985년 왕복 2차로인 지금의 까치고개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비올 때 장화를 신고 다녀야 했다"고 회상했다.

■'아리랑고개'가 성북고개로

   
동구 좌천4동에 자리잡은 증산의 산허리 고갯길로, 수정동과 범일동을 왕래하는 통로가 성북고개이다.

'아리랑고개'라는 지명은 이 고개가 험한 오솔길로 많은 사람들이 아리랑 노래를 부르면서 넘었다고 해서 붙여졌다. 그러나 10여 년 전 주민들이 이 한많은 아리랑고개의 이름을 '성북'고개로 개칭하면서 아리랑고개라는 이름은 사라지게 됐다. 성북고개는 부산진성의 북쪽이라는 의미다. 이 고갯마루에는 아직도 고개 이름을 딴 '아리랑공영' '아리랑상회' 등이 있어 이곳이 과거 아리랑고개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60년째 성북고개를 지키고 있는 김철용(61·부산 동구 수정5동) 씨는 "많은 사람들이 새벽녘에는 도시락을 들고 일터로 가기 위해 이 아리랑고개를 넘었고 어둑어둑해질 무렵 한 손엔 새끼줄에 묶은 연탄 한 두 장, 또 다른 한 손엔 쌀을 팔아 이 고개를 넘었다"고 말했다.


# 영산대 서정렬 교수

   
서정렬 교수
- 부산 사람들의 삶 녹아있는 산복도로
- 가치와 역사 재발견이 부산 재창조의 시작

- 타이타닉호 사건으로 유명세 얻은 루이비통 가방처럼
- 이젠 도시도 스토리 담아야 관광자원으로서의 경쟁력 있어

"서울을 서울답게 하는 것은 조선시대 이래 도읍으로 600년의 역사와 문화, 스토리가 풍부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부산다운 공간이자 부산 사람의 삶이 녹아 있는 부산의 원형질은 누가 뭐래도 산복도로입니다."

산복도로를 부산다운 공간으로 재창조해 부산의 상징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해온 영산대 서정렬(도시계획학) 교수는 "일본식 주택, 골목길, 계단, 서민들의 애환이 담긴 고갯길 등 부산의 내재적 특성과 부산 시민들의 삶을 온전히 간직한 산복도로야 말로 도시 경쟁력의 원동력"이라고 강조했다.

서 교수는 그동안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산복도로의 가치와 역사를 재발견하는 일에서부터 '부산 재창조'가 시작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루이비통 가방을 세계적 명품 가방으로 각인시킨 것은 호화 유람선 타이타닉호가 침몰했을 때 바다에 떠다니는 루이비통 가방에 의지해 목숨을 건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해지면서부터 입니다. 도쿄의 뒷골목과 뉴욕의 덜커덕거리는 100년된 지하철이 훌륭한 관광 자산이 되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결국 도시는 역사와 문화,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서 교수는 "우리가 추구했던 압축성장에 대한 대안도 산복도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기를 놓치면 산복도로 재생의 기회는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과거를 부끄러운 공간으로 치부해 숨기려고만 하지말고 밖으로 드러내 살을 더해야 합니다. 산복도로는 부산의 랜드마크로도 손색이 없습니다"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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