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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문학기행 <94> 최영욱 시인과 악양 문학기행

"내 詩 얘긴 재미없어… 평사리 왔으면 박경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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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면 평사리엔 꽃들 피는데/그것도 무더기로 피워내는데//서울의 삼십대 노동자 부부에게 한 소쿠리/부산의 점잖은 노부부에게 한 소쿠리/대전 광주의 팔팔한 젊은들에게도 한 소쿠리/그도 고봉으로 퍼주고선 밤이면 쓸쓸하다.//햇봄 묵은 정 다 퍼주고선/신이 게으름 피운다는 윤이월 봄밤에/평사리가 참 쓸쓸하다'('평사리 봄밤' 중)


내 이럴 줄 알았지. 날은 정월대보름. 달집에 불은 붙었겠다. 소원도 두 개나 빌었겠다. 달집 불꽃은 장하게도 치솟고. 악양면부녀회 아주머니들이 퍼주는 떡국은 두꺼비 파리 삼키듯 두 그릇. 어르신들 틈에 끼어 날름날름 소주까지 얻어마시고 나니 달집 넘어 지리산 친척뻘 봉우리 위로 성큼 보름달이 떴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정월대보름에 맞춰 악양 들판으로 떠난 문학기행이 이렇게 뭔가 큰 거 한 방 선물해줄 줄 진작에 알았다.


최참판댁 만들고 박경리토지길 닦은 사람

봄이 달려오고 있던 악양들판을 찾은 문학기행 일행이 박경리토지길을 따라 최참판댁으로 걸어가고 있다.
최영욱(53) 시인은 경남 하동군 악양면에 있는 평사리문학관 관장이다. 최 시인은 지난달 28일 독자 60여 명이 버스 두 대에 나눠타고 참가한 제94회 신(新)문학기행의 초청시인이었다. 그는 이 문학기행의 주인공이었으면서 동시에 이번 문학기행이 풍성한 인상으로 남을 수 있게 해준 주역이기도 하다.

(기자)"고향이 어디세요?" (최 시인)"하동이지, 하동읍." "최참판댁은 언제 완공한 건가요?" "1995년 지방자치제가 되면서 민선군수가 처음 나왔을 때 나를 포함해서 하동 문인들이 요청했지. '토지'의 무대라고 사람들이 자꾸 찾아오는데 아무 것도 없으니까 안되겠다고. 최참판댁을 소설에 묘사된 그대로 평사리에 만들어보면 어떻겠느냐고. 이야기가 잘 됐어요. 1998년에 첫 삽 떠서 2002년에 마무리했지." "최참판댁 바로 위에 있는 평사리문학관 개관은요?" "2004년." "평사리문학관 위에 있는 한옥체험관은요?" "2008년." "매년 11월 하동에서 열리는 토지문학제가 점점 유명해지던데요?" "2001년 11월에 제1회 행사를 열었으니까 올해 열면 10회째요. 토지문학제 만들려고 원주 계시던 박경리 선생을 내가 일곱 번 찾아갔지. 워낙에 자신을 내세우는 걸 싫어한 분이셨지."

하동군 악양면과 화개면에 널려있는 하동 명소를 이어 걷기 좋은 길로 가꿔놓은 32㎞의 박경리토지길이 지난해 마무리돼 인기를 끌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정한 전국 문화생태탐방로 7곳 가운데 하나다. 이 길을 가꾸는 일에 하동 문인들은 큰 힘을 보탰고, 최 시인은 그 한가운데 있었다.


도돌이표처럼 이야기는 다시 박경리로

평사리들판에서 열린 정월대보름 달집태우기 행사.
자, 이쯤에서 이번 문학기행 일행의 여정을 조금 소개해드릴까 한다. 화개장터에서 우리는 마중나온 최 시인을 만났다. 화개장터에서 하동녹차며 찻잔과 취나물, 국화차 같은 것을 살 수 있었다. 쌍계사 아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는 박경리토지길의 한 지점인 입석마을로 갔고 내처 걸어 최참판댁에 들어섰다. 봄이 곧 터져나올 것만 같은 길이었다. 최참판댁 바로 위 한옥체험관에서 최 시인의 문학이야기를 듣고 차를 얻어마셨다. 일행은 악양면을 가로지르는 평사리들판(일명 무딤이들)을 한참 걸었다. 이 길 또한 박경리토지길의 일부다. 그 들길과 무딤이들 한 가운데 서 있는 부부소나무(사랑송)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무딤이들에서 해넘이를 보고 바로 곁의 악양면 정월대보름 달집태우기 행사장으로 갔다. 수천 명은 됨직한 주민, 관광객들 속에 끼어 달집태우기와 달맞이를 했다. 어느 한 곳 최 시인과 하동 문인들의 오랜 정성과 배려가 배지 않은 곳이 없었다. 우리가 선물받은 대보름 문학기행은 최 시인과 하동 문인들 그리고 주민들이 준 것이었다.

한옥체험관에서 최 시인이 독자와 마주 앉았다. 그는 이렇게 시작했다. "저는 평사리문학관장이고 이곳에는 문학기행단이 워낙 많이들 오신다. 그분들과 만나면 나는 언제나 '토지'와 박경리 선생님의 문학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분들 또한 그 점을 궁금해한다. 오늘 드디어 저의 시와 제가 보는 문학세상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연하다. 이건 '최영욱 시인과 함께하는 악양문학기행'이니까.

그렇게 구수하게 자신의 하동과 섬진강, 지리산 그리고 시에 대해 말하던 그는 이야기가 고조될 즈음 "에이! 이거 (독자들께) 재미없겠네"하고 말을 끊었다. 그러면서 이어간 이야기는 박경리와 '토지' 그리고 하동에 관한 것이었다. 도돌이표처럼 이야기는 다시 박경리로.


무딤이들을 환하게 밝혀준 얼굴들

이번 문학기행에 참가한 김해의 청소년들이 평사리들판에서 즐거워하고 있다. 왼쪽 세번째가 천수진 씨.
까르르 웃음소리와 앳되고 맑은 얼굴들로 악양 들판이 환해졌다. 김해에서 학원 국어강사로 일하면서 이 문학기행에도 종종 참가하던 천수진(26) 씨가 이번에는 학원 제자들 24명과 함께 온 것이다. 학부모들에게 일일이 연락해 취지를 설명하고 허락받는 과정을 거쳤다고 했다. 그는 문학기행에 자꾸 다른 이들과 함께 오고싶은 이유를 "이렇게 직접 나오면 교과서와 교재를 통해서만 문학을 배우는 것보다 학생들이 문학을 접하는 데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란 믿음이 있기 때문"이라는 취지의 대답을 들려줬다. 일행 사이에서 그 생각과 정성에 탄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장지태 김영화 부부는 이날 시낭송을 했다. 교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편 장 씨는 "나는 매일 영화를 보며 사는 사람"이라고 했고 아내는 "문학기행이라는 이름의 여행을 부부가 함께 한 것은 20년 만에 처음"이라고 말했다. 부부가 함께 시인과 관객 앞에서 시낭송을 한 것도 처음일 것이다. 이번에는 이렇게 소담스러운 사연을 가진 참가자가 유난히 많은 것 같았다.

이런 일행을 위해 최 시인은 박경리라는 통로를 거쳐 자신의 마음이며 생각을 들려줬다. "박경리 선생께는 미술사를 전공한 따님(김지하 시인의 아내 김영주 씨다)이 있죠. 그가 오래 전 사찰을 다니며 탱화를 연구할 때 박경리 선생도 동행하곤 했죠. 하동 고찰에 들러 탱화를 보고 버스를 기다리던 중 박경리 선생은 눈앞에 펼쳐진 악양 들판을 본 겁니다." 그때 박경리는 어릴 적 거제의 외할머니댁에서 들었던 옛 이야기를 떠올렸다. 아기를 데리고 동냥다니던 가난한 아낙이 있었다. 아낙은 평소 도움을 받곤 하던 부잣집에 가 구걸을 했는데 하필 그때는 밥을 얻지 못했다. 그렇게 그렇게 해서 아낙은 아기와 함께 들판에서 굶어죽게 되었다. 아낙은 저주를 남겼다. "우리 두 입은 오늘 먹을 것이 없어 죽지만, 너희 집에는 먹을 것이 있어도 먹을 입이 없을 것이다." 절손(絶孫)의 저주다. 이것이 바로 대하소설 '토지'가 착상된 순간이라 한다.

최 시인은 이어갔다. "박경리 선생의 '본전론'이란 게 있죠. 잠시 왔다가 가는 세상이다. 자연은 우리가 잠깐 빌리는 것일 뿐이니 후손에게 잘 물려줘야 한다. 좀 더 갖겠다고 생명과 생태를 파괴하는 것은 우리 인류가 가진 본전마저 까먹는 짓이다. 그러지 말자." 그는 "결국 '토지'의 요체는 생명의 존엄, 산천의 소중함"이라고 했다. 그리고 시인 최영욱이 생각하는 문학의 요체 또한 그와 다르지 않을 듯했다.


# 최영욱 시인은

1957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2001년 '제3의 문학'으로 등단했다. 하동평사리문학관장을 맡고 있으며 시집 '평사리 봄밤'(고요아침)이 있다.


신문학기행 참가 문의=부산문화연구회(051)441-0485, 동보서적 803-8000

http://문학기행.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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