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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복도로 리포트 <3-13> 산복도로에 살다:생태공동체의 꿈, 물만골

십시일반 땅 사들여 지킨 '도심속 생태마을' 꿈

강제 철거에 맞서기 위해 조금씩 돈모아 마을땅 30% 매입

개발 광풍속에서도 깨끗한 땅과 물 지키며 사는 생태공동체

물많은 '물만골'의 마르지 않을 희망

  • 배재한 기자 myway@kookje.co.kr
  •  |   입력 : 2010-04-19 20:14:37
  •  |   본지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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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오후, 부산시청 맞은 편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10분쯤 달리자 황령산 골짜기에 자리잡은 낡은 슬레이트 지붕들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후 도착한 곳이 1970년대 전후의 영락 없는 시골 풍경을 한 물만골이다.

황령산 자락 해발 200~250m의 계곡 양쪽을 따라 길게 늘어선 물만골에는 때마침 벚꽃 매화 진달래 동백꽃이 절정을 맞고 있었다. 유난히 춥고 길었던 겨울잠에서 깨어나 연둣빛 새 이파리를 내민 나무들, 집 근처의 밭 언덕에서 쑥을 캐는 동네 아낙, 텃밭의 채소류를 나눠 먹으며(?) 함께 살아가는 고라니 꿩 산토끼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453세대 980명의 삶의 터전인 물만골. '도심 속 봄 정취가 이보다 아름다운 곳이 있을까' 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가난한 이들이 일군 도심 속 공동체

   
지난 17일 부산 연제구 연산2동 황령산 자락에 자리잡은 물만골의 작고 아담한 슬레이트 집마다 벚꽃 매화 등이 만발했다.
'물이 많이 솟는 곳'이라는 뜻을 담은 물만골은 한국전쟁 당시 군사기지용 도로를 개설하면서 사람이 하나 둘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1964년 부산 동구 초량동 매축지 철거민 일부가 집단 이주하면서 본격적으로 마을이 형성됐다. 대부분 남의 땅에 움막을 짓고 살았다. 무허가 거주지가 늘어나자 1991년 동래구청이 대대적인 강제 철거작전에 나서자 마을 주민들은 맨주먹으로 철거반과 맞서서 마을을 지켜내기도 했다.

낮에는 집이 철거반에 뜯기고 밤엔 다시 짓는 일을 수없이 반복하던 마을주민들은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다. '주민 참여, 주민 자치'의 마을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 기반인 토지 매입에 나서기로 방향을 틀었다. 1999년 물만골 공동체를 만든 뒤 이듬해부터 가구당 월 10만 원가량을 모아 땅을 사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1999년 처음 1만5500㎡(3500평)를 사들이는 것을 시작으로 지난해까지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9만 ㎡(약 3만 평)를 매입했다. 주민들은 향후 10년 안에 주민들의 거주지역 36만3000㎡(11만여 평)를 모두 사들여 도심 속 생태공동체를 실현한다는 야심찬 꿈을 키워가고 있다.

물만골 공동체 권병안(47) 간사는 "마을공동체 건설을 위해 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내 땅 매입에 나선 지 10년 만에 전체 마을부지의 30%에 달하는 3만 평을 구입한 것은 의미있는 성과로 평가하고 있다. 앞으로 10년 안에 외지인 등이 소유한 마을 거주지를 마을 사람의 이름으로 모두 사들이겠다는 목표로 일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도전받는 물만골 신화

   
물만골 입구에 버티고 서 있는 '물만골 지킴이'와 '황령산 지킴이' 장승. 박수현 기자 parksh@kookje.co.kr
물만골은 물, 공기, 인심이 좋아 '삼다의 마을'로 통한다. 주민들은 황령산 속에서 솟는 천연 지하 암반수를 식수로 사용하고 있다. 수돗물보다 더 맑고 깨끗한 '마실 물'을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주민 참여, 주민 자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출범한 물만골 공동체는 그동안 적잖은 성과를 거뒀다. 2002년 환경부로부터 '생태마을'로 지정되고, 같은 해 부산시로부터 '녹색환경대상'을 받았다. 환경오염 방지를 위해 8개의 지하수 중 4개를 자체 폐공처리하고, 음식물 쓰레기 사료화 및 자원재활용으로 황령산 생태계 복원과 자연생태마을 만들기 노력이 높은 평가를 받은 결과였다.

그러나 지금 물만골은 시험대에 서 있다. 주민 자치 생태공동체 만들기에 나서고 있지만 개발에 대한 주민들의 현실적인 욕구도 무시할 수 없다. 물만골까지 개발 광풍이 불어닥치고 있는 것이다. 부산의 한 대기업이 물만골 입구에 지하수 개발을 포함한 대규모 개발 계획을 추진하고 있어 주민들로서는 큰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다. 급격한 노령화로 어린이와 청년층이 줄고 있어 마을의 활력이 떨어지고 있다. 마을 주민 간 공동체 의식과 결속력이 약화되고, 주민과 마을대표 간 믿음이 예전 같지 않은 것은 공동체의 앞날을 걱정하게 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물만골에서 26년째 살고 있다는 한 주민(64)은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주민들이 음식도 나눠먹고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도와주고 또 마을 일을 의논해서 처리했는데, 요즘은 마을 현안이 있어도 주민들이 관심을 갖지 않고 화합도 잘 안되는 것 같다"고 달라진 물만골 인심에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부산대 윤일성 교수(사회학)는 "도심 속 가난한 사람들이 손쉬운 재개발 방식이 아니라 힘을 합쳐 생태마을로 바꾸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이 아름답다"면서 "이젠 정부와 지자체 등 공공부분도 이런 노력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지원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공부방, 달동네 아이들을 품은 희망 나눔터

물만골을 온 몸으로 사랑하는 이들이 모여 시작한 것이 '물만골 공부방'이다. 1994년 천주교 조성제 신부가 처음 문을 연 공부방은 올해로 16년째를 맞고 있다. 서유승 신부에 이어 2007년부터 공부방을 맡고 있는 김아가페 수녀는 "공부방은 학원 갈 형편이 못되는 아이들의 학습공간이자 엄마 아빠의 빈자리를 일정부분 채워주는 가정의 역할까지 하고 있다"고 말했다. 천주교 수도자와 대학생 자원봉사자, 27명의 학생이 어우러지는 공부방은 물만골 아이들의 제2의 학교이자 집이며, 희망 나눔터인 것이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벗이 되고자 가장 낮은 자세로 물만골로 찾아든 눈맑은 몇몇 수도자들이 아이들의 눈높이로 아이들을 가슴으로 품는 공부방은 물만골의 마르지 않을 희망으로 마을사람들의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다.


# 김이수 물만골 공동체 대표

- 주민 참여자치 실현하는 진정한 풀뿌리 공동체로

   
"마을의 현안을 마을 사람들의 손으로 결정하고 또 추진하는 이른바 '주민 참여, 주민 자치'를 실현함으로써 전국에서 가장 모범적인 풀뿌리 마을공동체를 만들고 싶습니다. 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외되지 않으며, 주민의 삶의 질을 높이되 지속 가능한 지역개발을 모색하는 것이 우리의 최대 목표입니다."

물만골 공동체 대표를 맡고 있는 김이수(47·사진) 위원장은 전국의 어느 지역, 어느 마을에서도 시도해보지 않은 일들을 하고 있어 어려움도 한 두 가지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만큼 물만골 공동체가 하는 일에 대한 외부의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일이나 성과에 비해 부풀려지고 미화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다고 그는 솔직히 털어놨다. 물만골 공동체는 자치와 행정의 통합을 통한 진정한 주민 자치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다. 중요 의사 결정은 마을 총회에서 이뤄진다.

"주민들의 개발욕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마을사람들은 이 물만골이 아파트나 고층빌딩이 들어서는 난개발이 아닌 친환경적인 전원마을로, 또 이웃 간 정과 우의가 살아 숨쉬는 지금의 모습이 오래 오래 보존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마을의 미래에 대한 이 같은 합의가 있기에 물만골 공동체의 미래는 밝다고 확신합니다."

김 위원장은 물만골 출신이 아니다. 부산대 의대를 졸업하고 부산의료원에 근무할 때 의료봉사 활동을 하면서 물만골에 관심을 갖게 됐다. 결국 그가 물만골로 들어온 것도 물만골에 대한 관심이 물만골 사랑으로 바뀐 결과다. 1999년 1월 집을 물만골로 옮겼다. 현재 어머니(80)가 이 집에서 살고 있으며, 1주일에 사나흘은 이곳을 찾는다.

바쁜 개업의(성형외과)로 활동하면서도 물만골 공동체 대표직을 맡은 것은 누군가 나서 이 마을 사람들의 바람을 실현시켜야겠다는 사명감 때문이다. "그동안의 성과만으로도 물만골 공동체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마을 공동체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러나 마을 주민들은 이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이 물만골의 30, 50년 후를 설계하고 있습니다. '도심 속 전원 생태 마을', 물만골 공동체의 최종 지향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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