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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복도로 리포트 <3-14> 빈곤의 섬이 된 `매축지 마을`

3無3多의 동네… 최소한의 복지도 사치다

3無 : 부엌·나무·화장실, 3多 : 빈집·노인·공동화장실

산복도로에 살다

  • 배재한 기자 myway@kookje.co.kr
  •  |   입력 : 2010-04-26 20:41:49
  •  |   본지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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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9채의 폐·공가, 주민의 10%는 생활보호대상자
- 재개발은 논의만 20년째
- 화장실 딸린 집도 없는 마을에 녹지조성은 배부른 소리

부산에 남은 마지막 매축지로 불리는 동구 범일5동 '매축지 마을'. 부산도시철도 범일동역에서 내려 부산진시장과 성남초등학교를 거쳐 굴다리를 지나면 곧바로 만나게 된다.

1876년 개항한 부산항은 해안 쪽에 평지가 없어 대형 해안 매립을 통해 용지를 확보했다. 일제 강점기 때 바다를 메워 뭍을 만드는 매축공사가 진행됐다. 중앙동 일대와 동구 해안 대부분이 이렇게 탄생한 매축지다.

매립공사를 통해 탄생한 범일5동은 부두와 병참기지로 사용됐다. 해방과 함께 일본군이 물러나자 귀국선을 타고 조국으로 돌아온 오갈 데 없는 귀환 동포들이 하나 둘 거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한국전쟁 때는 피란민들이, 산업화 시절에는 농촌을 떠난 이농자들이 찾아들어 고단한 삶을 내려놓은 곳이다.


■'3無 3多의 동네', 여기가 부산인가

   
낡은 회색 슬레이트 지붕이 다닥다닥 붙은 매축지 마을.
범일5동 매축지 마을에 들어서면 시간이 멈춰선 것이 아니라 시간을 거슬러 존재하는 동네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낡고 허물어진 집들이 곳곳에 늘려 있다. 발길이 닿은 길목마다, 눈길이 가는 골목마다 안쓰럽고 쓰라린 풍경들이다. 인기척이 끊긴 지 몇 년이 흘렀을 폐가, 곳곳에 '수도급수전 직권폐전'을 알리는 경고문이 붙은 대문, 방문을 담벼락 삼고, 새시문과 새시문을 잇대어 난 골목 ….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이 마을엔 '세 가지가 없고 세 가지가 많다'고 들려줬다. 대부분의 집들이 부엌이 없고, 화장실이 없고, 나무(숲)가(이) 없다는 것이다. 5~10평 안팎의 집에 화장실과 부엌이 있을 리 없다. 화장실을 설치할 공간조차 없다. 달랑 방 하나뿐인 주거지가 많은 데 나무 심을 공간이 있겠는가.

많은 것 세 가지로는 빈집이 많고, 공동화장실이 많고, 노인이 많다는 것이다. 최근 김길태 사건 이후 빈집을 정밀 조사한 결과 이곳에서만 무려 259채. 최근 부산시가 폐·공가 철거 대책을 시행하면서 발표한 폐·공가 통계 610채가 맞다면 무려 43%가 범일5동에 몰려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부산시의 폐·공가 통계가 엉터리인 셈이다. 집 안에 화장실이 없어 대부분 공동화장실을 이용한다. 서너집이 함께 사용하는 재래식 공동화장실이 자그마치 91개. 65세 이상 노인인구 비율은 전체 5514명 중 1087명으로 19.7%에 달한다. 부산 동구 범일5동 김광근 사무장은 "부산에서 연탄 소비량이 가장 많을 정도로 이 지역은 열악한 마을"이라며 "그렇지만 마을 사람들 간 인정은 살아있어 꼭 시골 면사무소에 근무하는 기분을 느낀다"고 말했다.

■매축지 마을에서 국가의 역할을 묻다

   
주민들은 입구 출입문만 있고 개별 용변기에는 문이 없는 공중화장실을 이용한다. 박수현 기자 parksh@kookje.co.kr
범일5동 매축지 마을은 일제강점기 부두 짐 운반에 필요한 말을 키우는 마구간과 마부와 짐꾼들의 막사들이 많았다. 해방과 함께 이곳에 들어온 귀향 동포, 피란민 등은 이 마구간을 헐어 살림집으로 바꿨다.

주거 환경이 처음부터 열악했던 것이다. 젊은 사람, 돈 번 사람들은 마을을 떠났다.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재개발은 아직도 논의 중이다. 주민들은 지칠 대로 지쳤다. 일부는 이미 체념했다. 열 세살 때 부모의 손에 이끌려 경남 남해에서 이곳으로 온 김종선(72) 할머니는 "재개발 지구로 지정돼 집수리도 못하고 있다. 비 오면 물 새는 집이 대부분이다. 차라리 재개발 지정이 해제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난해 남편과 사별한 김 할머니는 폐지와 고철을 팔아 번 돈으로 생활하고 있다. 김 할머니에겐 쓰레기가 생계의 원천이자 희망인 것이다. 범일5동엔 생활보호대상자가 357세대 558명이나 된다. 10명 중 1명이 생보자인 것이다.

이 마을에서 40년째 살고 있다는 박재건(75) 씨는 "이런 마을에 산다는 것이 창피하죠. 자식들이 학교 다닐 때 친구도 데려오지 않았다"면서 "비참하게 살고 있지만 돈 없고 늙은 노인뿐이라 어쩔 도리가 없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국민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라고 할진대, 매축지 마을 사람들은 '가난 구제는 정녕 나라도 못하는가'며 국가의 역할을 묻고 있었다.

■매축지 마을 건강지킴이, 경차 타는 의사

   
부산 동구 범일5동 '매축지 마을'의 한 노인이 허물어진 집 벽을 손보고 있다.
매축지 마을의 유일한 병원 '혜명의원'. 1998년부터 12년째 이곳에서 개업의로 활동하는 황수범(54) 원장은 "환자 중에는 혼자 사는 노인이 많다. 제가 치료하기 어려운 환자는 직접 차에 태워 큰 병원으로 모셔다 드리기도 한다"면서 "과거에는 어려운 환자들한테 진료비도 안받았지만 요즘은 환자 유인 행위로 비칠 수 있어 그러지도 못한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이 마을의 유일한 약국으로, 혜명의원 건물 1층에서 명진약국을 운영하는 한소정(66) 약사는 "황 원장은 거동이 불편한 환자의 집을 직접 찾아가 치료하는 왕진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이 마을 사람들의 건강을 극진히 보살피고 있다"고 들려줬다. 모두가 돈을 좇아, 환자를 찾아 번화가로 떠났지만 황 원장은 1996년산 경차 티코를 직접 몰며 가난한 동네, 소외된 사람들의 건강지킴이 역할을 하고 있다.


# 매축지 마을서 한평생 안승률씨

- "공동화장실이라도 수세식으로 바꿔달라"

   
"부산에서 이렇게 낙후된 지역이 없을 것입니다. 30년 가까이 재개발 논의만 무성할 뿐 진척이 없습니다."

이곳에서 태어나 고향을 지키며 살아 온 안승률(56·사진) 씨는 "재개발이 안 될 바에야 차라리 지정을 해제했으면 좋겠어요. 집집마다 집에 비가 새도 수리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면서 "마을 사람들도 지칠대로 지쳐 거의 자포자기 상태"라고 말했다.

동네에서 동원식당이라는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지만 장사도 예전만큼 못하다. "마을에 사람이 없어요. 한 해가 다릅니다. 20년 전만 하더라도 마을에 젊은 사람도 많고, 활력이 있었지만 요즘 골목이 텅 비었어요."

매축지 마을은 40, 50년 전에 변화와 발전을 멈춘 것이나 다름없다고 그는 말한다. 1960년대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단골 영화 촬영지로 탈바꿈(?)했다. 한국 영화 흥행의 신화가 된 '친구'도 이곳에서 촬영됐다. 영화 '친구'의 동수와 준석 등이 낡은 분무식 소독차를 뒤따르던 장면이 촬영된 곳이 바로 이 매축지 마을 입구의 굴다리이다. 이후 임권택 감독의 '하류인생', 봉준호 감독의 '마더', 올 하반기 개봉 예정인 이정범 감독의 '아저씨' 등이 매축지 마을을 배경으로 촬영됐다.

그는 "영화촬영뿐 아니라 아마츄어 사진가들이 주말이나 휴일이면 이 마을의 퇴락한 풍경을 렌즈에 담느라 여념이 없다"면서 "그렇지만 마을 사람들은 우리 마을이 영화의 배경이 되고 사진작가의 단골 촬영지가 되는 것을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다"고 털어놨다.

마을 주민들의 유일한 희망은 북항재개발이다. 민간에 의한 재개발은 사실상 물 건너 간 것이나 다름없기에 북항재개발 때 정부나 지자체 등 공공기관이 나서 마을의 재개발이 추진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는 "우리 마을 사람들도 사람답게 살고 싶다"면서 "재래식 공동화장실만이라도 하루빨리 수세식으로 바꿔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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