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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문학기행 <96> 송찬호 시인과 함께 한 보은

가죽가방에서 산 소를 느끼고

복사꽃 무사들과 실랑이하는 정이 가는 곱슬머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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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만나러 가는 길, 꽤 많이 긴장했다. 그의 시집을 읽었기 때문이다.


'옛말에 꽃싸움에서는 이길 자 없다 했으니/그런 눈부신 꽃을 만나면 멀리 피해 가라 했다/언덕 너머 복숭아밭께를 지날 때였다//갑자기 울긋불긋 복면을 한/나무들이 나타나/앞을 가로막았다//바람이 한 번 불자/나뭇가지에서 후드득 후드득,/꽃의 무사들이 뛰어내려 나를 에워쌌다//나는 저 앞 곡우(穀雨)의 강을 바삐 건너야 한다고/사정했으나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그럴 땐 술과 고기와 노래를 바쳐야 하는데/나는 가까스로 시 한 편 내어놓고 물러날 수 있었다'(시집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중 '복사꽃' 전문)


이 시는 지난해 나온 그의 네 번째 시집(그는 1987년 등단했다)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중 쉽고 친근한 작품에 속한다. 이 시 한 편으로 그의 시 세계를 가늠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어쨌거나 언덕길에서 만난 복사꽃 앞에서 '울긋불긋 복면을 한 꽃잎 무사들에게' 에워싸이는 세계로 차원 이동을 해 버리는 감수성 앞에서, 긴장됐다.

부산에서 충북 보은까지 제법 먼 길을 달려가 직접 그를 만나고 나자, 그만 긴장이 탁 풀렸다. 1~10㎝까지 잴 수 있는 자(尺)가 있다고 치자. 그 자의 왼쪽 끝은 '맞닥뜨린 순간 살살 긴장되면서 오늘 너하고 나하고 한 번 해보자는 식으로 전의가 불타오르게 하는 종류의 사람', 오른쪽 끝은 '만난 순간 허물어지듯 긴장이 탁 풀리면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사람'이라 치자. 그는 그 자의 오른쪽 끝에 있을 것 같은 인상이었다.


한 몸이 된 노래와 이야기의 통쾌한 역전

보은에서 유서 깊은 명소로 꼽히는 선병국 고가 앞마당에 선 송찬호 시인. 선병국 고가는 규모와 형태 면에서 궁궐에 버금 가는 고건축물이다.
"독자와 만나거나 문학강연을 하는 자리가 많지 않은데, 나갔다 하면 받는 질문이 있어요." 그는 '어떤 질문인지 아시겠죠?' 하는 눈빛으로 30여 명 문학기행 일행을 둘러봤고, 좌중에서는 알아차렸다는 듯 웃음이 쿡쿡 새 나왔다. "그 파마, 어디서 얼마 주고 한 거냐? 원래 그렇게 곱슬머리일 리는 없고. 이런 질문들이죠. 근데 제 머리칼은 자연산입니다. 젊었을 땐 이 곱슬머리 때문에 속이 상하기도 했죠. 지금은 의연합니다." 일행은 웃었다. 보은의 명소 속리산의 잔디밭엔 햇살이 튀고 있었다.

이런 상황 앞에선 긴장을 유지할 도리가 없었다. 취재고 뭐고 저 시인과 함께 봄빛 속 보은 곳곳을 내내 돌아다니면 좋겠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고개를 들었다. 송찬호 시인과 함께 한 충북 보은 문학기행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런 느낌이었다. 다시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으로 가보자. 꽃사태라도 난 것처럼 꽃에 관한 시가 많은 이 시집에서 꽃들과는 어울리지 않게 '가죽'을 앞세운 시가 한 편 눈에 띄었다.


'가방이 가방 안에 죄수를 숨겨/탈옥에 성공했다는 뉴스가/시내에 쫙 깔렸다//교도 경비들은, 그게 그냥 단순한/무소 가죽 가방인 줄 알았다고 했다/한때 가방 안이 풀밭이었고/강물로 그득 배를 채웠으며/뜨거운 콧김으로 되새김질을 했을 줄/누가 알았겠냐고 했다//끔찍한 일이다 탈옥한 죄수가 온 시내를 휘젓고 다닌다면/숲으로 달아난다면/구름 속으로 숨어든다면/뿔이 있던 자리가 근지러워/뜨거운 번개로 이마를 지진다면.//한동안 자기 가방을 꼼꼼히 살펴보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다/열쇠와 지갑과 소지품은 잘 들어 있는지/혹, 거친 숨소리가 희미하게나마 들리지는 않는지/그 때 묻은 주둥이로 꽃을 만나면 달려가 부벼대지는 않는지'('가방' 전문)


신나는 일 아닌가. 내가 들고 다니는 이 소가죽가방에 한 때 초원을, 초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풀밭 쯤은 앞마당 삼아 거닐고 뛰었던 소들의 생명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것은. 앞으로 꽃들 곁을 지나갈 때 가방이나 지갑이 꿈틀댄다는 느낌이 들면 잠깐 발걸음을 멈춰주자는 거다. 가방과 지갑이 '그 때 묻은 주둥이로 꽃을 만나면 달려가 부벼대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죄수가 가방에 숨어 탈옥한 게 아니라, '가방이 가방 안에 죄수를 숨겨 탈옥에 성공했다'고 보는 것은 통쾌한 역전이다. 송찬호 시인의 시에는 이렇게 노래(시) 속에 이야기가 있고, 이야기 속에 노래가 있는 게 많았다. 하지만 노래와 이야기라는 두 요소는 세심하게, 교묘하게 접합돼 있어 그의 시를 읽으면서 이 두 요소를 분리해내는 것은 쉽지 않다. '둘이 한 몸이 됐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고향의 풍경이 몸속에 스며들어 있는 시인

속리산국립공원 앞 잔디밭에서 송찬호 시인(오른쪽)이 독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제 그의 고향 보은 이야기도 들어보자. 그는 보은에서 태어나서 경북대 독문학과를 다닐 때를 빼고는 보은에서 벗어나 산 적이 없다 한다. 적절할지 확신은 서지 않지만, 그의 시 '늙은 산벚나무'가 이 대목에서 토막토막 떠오른다.

'앞으로 늙은 곰은 동면에서 깨어나도 동굴 밖으로/나가지 않으리라 결심했는 기라/동굴에서 발톱이나 깎으며 뒹굴다가/여생을 마치기로 했는 기라'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시에 보은이라는 지명은 안 나오지만 줄곧 읍내에서 떨어진 시골마을에 살면서 보은의 꽃이며 자연이 구체적으로 내 몸속에 녹아있는 것 같다."

시 '늙은 산벚나무'는 이렇게 이어진다. '그런데 또 몸이 근질거리는 기라/등이며 어깨며 발긋발긋해지는 기라/문득, 등 비비며 놀던 산벚나무가 생각나는 기라'. 송찬호 시인은 "초기엔 독자들이 읽기에 힘들고 어려운 시를 많이 썼는데 네 번째 시집에 와서 그게 좀 바뀐 것 같다. 독자들께서 좀 더 편하고 친근하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시는 이어진다. '그때 그게 우리 눈에 딱, 걸렸는 기라/서로 가려운 곳 긁어주고 등 비비며 놀다 들킨 것이 부끄러운지/곰은 산벚나무 뒤로 숨고 산벚나무는 곰 뒤로 숨어/그 풍경이 산벚나무인지 곰인지 분간이 되지 않아'. 시단은 그런 그를 일찌감치 알아챘는지 2000년 동서문학상과 김수영문학상, 2008년 미당문학상 같은 굵직한 문학상을 그에게 안겼다.

이 시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우리는 한동안 산행을 멈추고 바라보았는 기라/중동이 썩어 꺾인 늙은 산벚나무가/곰 발바닥처럼 뭉특하게 남아 있는 가지에 꽃을 피워/우리 앞에 슬며시 내미는 기라'

그의 시에 고향이 깊숙이 널찍하게 스며들어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이날 송찬호 시인은 보은의 문화해설사 두 분을 초청해 오장환문학관, 선병국 고가, 속리산 법주사로 안내했다. 그의 시에 고향 보은이 '직접' 드러나는 경우가 별로 없었기에 이날 기행이 '문학기행'과 '보은역사기행'으로 양분돼 진행된 셈인데 시인과 문화해설사의 환대가 무척 고마웠다.

'삼남의 접경'인 보은을 다녀온 길이니 이 정도 사항은 말씀드려야겠다. 보은이 가장 아름답다는 이 계절에 보은에 가시거든 '천재시인' 오장환문학관과 선병국 고가 그리고 법주사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의 미끈하고 섹시한 엉덩이라인은 꼭 보고 오시기를. 선병국 고가 곁에 있는 선병우 가옥은 복해가든이라는 고풍스러운 음식점을 겸하고 있다. 그 품격 있는 식당에서 먹은 버섯전골이 하도 맛있어서 주인장에게 "정말 맛있었다"고 말했더니 주인장은 천천히 말했다. "지금 이 시간이면 배가 고프실 때니께유." 그 한마디로 여기가 충청도란 사실이 더 실감났다.

신문학기행 참가문의=부산문화연구회(051)441-0485 동보서적 (051)803-8000
http://문학기행.kr


■ 송찬호 시인은

1959년 충북 보은에서 태어나 경북대 독문과를 나왔다. 1987년 '우리 시대의 문학' 6호로 등단했으며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10년 동안의 빈 의자' '붉은 눈, 동백'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등 시집 4권을 냈다.

동서문학상, 김수영문학상, 미당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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