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전 ‘영화숙’에서 사망한 친구들이 묻힌 산에 올라 막걸리를 뿌려줬습니다. ‘똥통’에 남몰래 버려진 아이들도 정말 많았어요. 마음이 심란하네요, 제 발로 여길 다시 찾아오다니…. 죽지 않으려고 처절하게 버텼던 그때의 고통을 남들은 정말 모를 겁니다.”
유수권(가명·68) 씨는 기자와 만나기 전날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고 했다. 밥알이 넘어가지 않아 끼니도 걸렀다. 휠체어를 탄 자신을 돕는 장애인활동지원사에게도 출근하지 말라고 일러뒀다. 지난 4일 유 씨는 국제신문 취재진과 ‘영화숙’과 ‘재생원’이 있던 부산 사하구 장림동을 찾았다. 형제복지원이 생기기 전인 1960~1970년대 초반 부산의 최대 부랑인 시설이던 영화숙에서 그는 5년 가까운 세월을 갇혀 지냈다. 강제노역과 폭력·굶주림으로부터 살아남은 건 기적이었다.
그는 사하경찰서에서부터 구평고개사거리에 이르는 비탈에 인권침해의 상징인 두 시설이 있었다고 지목했다. 과거 그곳은 영화숙·재생원 외에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현재는 냉동창고와 여러 공장이 들어선 상태다. 유 씨가 영화숙의 정문이 있던 곳이라고 가리킨 자리엔 자동차 운전학원이 있었다. 그 앞엔 6~8차로의 을숙도대로가 깔려 있다. 유 씨가 강제수용될 때는 리어카 한 대가 겨우 지나는 좁은 길밖에 없었다고 한다.
유 씨 외에도 이곳이 영화숙이 있던 곳이라고 증언한 피해자는 또 있다. 그러나 두 곳의 위치를 확인하는 공식 작업은 지 금까지 없었다. 진실 규명이 이뤄지고 있는 형제복지원(1975년~1987년)보다 앞서 진행된 인권침해 사건에 대해선 관심이 부족한 것이다.
유 씨의 기억에 영화숙 주변에는 도심에서 가져온 잔반이나 분변을 버리는 늪이 많았다. 수용자들이 ‘똥통’이라고 불렀던 늪이다. 실제로 신평·장림(사하소방서~사하우체국) 일대는 갈대밭 습지가 매립되기 전까지 부산시의 공식 쓰레기장이었다. 유 씨는 “잔반에서 멸치를 건져 말린 뒤 먹었다. 배가 고파 그렇게 하지 않고선 도저히 살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영화숙에선 강냉이죽이나 보리밥으로 하루 두 끼를 먹는 게 고작이었다.
사하소방서를 지날 때 그는 휠체어를 멈춰 세우곤 ‘똥통’에 버려진 아이들을 떠올리며 울먹였다. 소대장(수용실 관리자)에게 맞아 죽은 아이들이 야밤에 이곳에 버려졌다고 했다. 가마니에 덮여 뒷산에 묻힌 아이도 셀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 “늪이니까 (시신이) 한 번에 잠기질 않잖아요. 가라앉을 때까지 꾹 눌러 완전히 사라지게 했어요. 소대장 말을 안 듣는다는 이유로 맞아 죽기도 하고 결핵 치료를 못 받아 생을 마감하기도 했어요. 그때는 그게 ‘죽을 이유’가 되는 시절이었거든.”
영화숙과 30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행려환자구호소(현 마리아마을)가 차려져 아픈 사람을 돌봐줬다. 수용자 중 그곳에 갈 수 있는 이는 “정말 운이 좋은 애들”이었다고 한다. 보다 못한 수녀들이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직접 영화숙을 찾아와 상처에 약을 발라주거나 이를 잡기 위해 하얀 분가루를 뿌려줬다. 유 씨는 “당시엔 행려환자구호소를 구호병원이라고 불렀다. 그곳에 가는 게 소원이었다”고 회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