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꼭 알아야 할 위트컴 장군 <6>어린 시절 꿈…군인이 된 성자(聖者)
리차드 위트컴(Richard S. Whitcomb, 1894~1982) 유엔군(미군) 부산군수기지사령관(준장)은 1953년 11월 27일 부산역전 대화재가 발생했을 때 ‘물고기보다 물고기를 잡는 법’의 부산 재건 프로젝트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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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트컴 장군이 부산에서 행한 선행을 모은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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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법을 어겨가며 텐트와 먹을 것을 나눠준 것은 물론 학교, 병원, 이주주택, 고아원을 지었다. 화재로 폐허가 된 부산의 도시 기능을 살린다는 장기적 관점에서 해결책을 찾은 셈이다.
육군 5군수지원사령관(준장)을 지낸 박주홍 경북대 교수는 “위트컴 장군은 화재에 따른 재해의 단순 복구 수준을 넘어 장기적으로 거주할 가옥 건설, 도시 기반시설 구축, 의료환경 개선, 학교 및 전쟁고아 지원 등 총체적으로 도시를 재건한다는 차원에서 접근했다”고 분석했다.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군인으로서는 쉽지 않은 선행을 실천했다는 의미다. 박 교수는 위트컴희망재단 이사로 장군의 리더십을 연구하고 있다.
장군은 자신의 모든 노하우와 경험을 끌어 모아 해결책을 고민했다. AFAK(Armed Forces Assistance to Korea, 미군대한원조)를 활용한 재건사업이다. AFAK는 부산역전 대화재를 극복하기 위한 묘책으로 위트컴 장군이 제안하고 미 8군 사령관 맥스웰 테일러 장군이 승인해 탄생했다. 미군의 기술력과 노동력을 직접 투입함으로써 군이 중심이 되어 복구 사업을 추진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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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11월 부산역전 대화재 이후 위트컴 장군이 부산 동광동에 이재민을 위한 천막촌을 마련했다. 강석환 부산관광협회 부회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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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많은 양의 물자가 미군을 통해 공급됐고, 조직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인력도 군이 다른 조직보다 월등했다. 이 프로그램은 AFAK 기금과 미군 및 한국군의 인력을 연계해 한국의 지역 행정기관을 집중 지원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민간에서는 군이 지원하지 않는 자제와 기본 노동력을 제공했다. 1953년 11월부터 1958년 11월까지 총 600만 달러의 AFAK 예산이 투입됐다. 이 중 절반에 해당하는 300만 달러가 1954년 말까지 부산에 집중됐다. 부산역전 대화재 복구에 절반이 넘는 사업비가 배정됐다는 얘기다. 이뿐 아니라 위트컴 장군은 재건활동을 전담하는 PMP(Pusan Military Post)라는 별도의 조직을 꾸려 부산 재건에 박차를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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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복구를 위해 위트컴 장군이 요청한 공사 자재에 대해 설명하는 문서. 제5군수지원사령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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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홍 교수는 부산 재건 과정에서 발휘한 위트컴 장군의 리더십을 ‘종합예술’이라고 표현한다. 박 교수는 “도시가 폐허로 변해버린 상황에서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모으고 통합해 해결책을 찾았다. 그동안 축적된 장군의 모든 경험이 지식이 총동원됐다. 장군의 리더십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평가했다. 2020년부터 해마다 ‘위트컴 장군 리더십 세미나’를 열고 있고 유엔평화기념관 박종왕 관장은 “위트컴 장군이 부산에서 행한 선행을 보면 장군은 군인이 된 성자”라고 강조했다.
위트컴 장군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김재호 위트컴희망재단 이사 겸 부산대 전자공학과 명예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어린 시절 위트컴 장군의 꿈은 필리핀에서 선교사를 하는 것이었다. 미국 캔자스주 토피카에 있는 위시번대학에 다닐 당시 학생자원봉사단의 청년 리더 활동을 하면서 그 꿈을 키웠다. 김재호 교수는 “장군이 부산에서 베푼 위대한 선행은 군인 이전에 가난한 나라에서 자신의 삶을 바치려던 선교사 정신으로 행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장군의 아버지(George H. Whitcomb)는 미군 캔자스주 대법관을 지냈고, 어머니(Jessie Whitcomb)는 작가이자 아버지와 보스턴대 법대의 동창생이었고 미국 법대에서 강의한 최초의 여성이었다. 위트컴 장군은 1894년 캔자스주 토피카에서 5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