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일암에서 법정 큰스님을 처음 뵀다. 그때 나는 샘터사에 근무했는데, 스님 책을 편집하면서 불일암을 자주 찾았던 것이다. 회사 일로 가는 출장길이었지만, 나는 1박2일 출가하는 기분으로 서울을 떠나곤 했다. 스님이 그리울 때마다 몇 가지 장면이 먼저 떠오른다. 한 번은 스님께서 국수를 끓이시고 내가 설거지 당번을 했을 때다. 스님께서 삶은 국수를 불일암 우물가로 가져가 찬물에 식히는 순간, 꼬들꼬들해진 국수 몇 가닥이 우물 밖으로 넘쳐흐르는 물에 떨어졌다. 스님께서는 망서리지 않고 "신도가 수행 잘하라고 보내준 정재(淨財)인데"라며 주워 드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 해 여름 스님께서는 분홍빛 한지에 휘호를 써 보내주셨다. 내용은 지금까지 나의 좌우명이 되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대나무 그림자가 드리운 사립문 앞에는 섬돌이 놓여있다. 사립문에 일렁이는 햇살처럼 시가 어려 있다. '눈 속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깨달음의 시다. '대나무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움직이지 않고//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물에는 흔적 하나 없네'

스님은 수필 '무소유' 속에 다음과 같이 당신의 생각을 담아놓고 있다. '사실,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 나는 아무 것도 갖고 오지 않았었다. 살 만큼 살다가 이 지상의 적(籍)에서 사라져 갈 때에도 빈손으로 갈 것이다. 그런데 살다 보니 이것저것 내 몫이 생기게 된 것이다. 우리들이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가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것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는 말이다.'

스님께 큰절을 하고 나면, 사람마다 다 다르지만 내 경우는 집사람과 아이들에 관한 얘기를 먼저 물었다. 손님 중에는 큰스님이니까 아주 심오한 법문을 설하시겠지 하고 귀를 기울이는 분도 있지만 스님은 의외로 자질한 일들을 먼저 챙겼다.

이윽고 나는 추도사를 쓰기 시작했다. 절제 할 수 없을 만큼 얼굴이 상기되었지만 형용사를 버리고 뼈와 같은 명사와 동사만으로 다음과 같이 써내려 갔다. '눈앞이 막막합니다. 무엇이 바빠 스님이 좋아하시는 연둣빛 봄날을 마다하시고 가십니까. 영혼의 모음 같다던 뻐꾸기 소리를 더 듣지 않으시고 가십니까. 잠시 후 스님은 이승의 옷을 벗고 내생의 새 옷을 입으셨습니다. 스님. 찻물을 올리고 향을 사르며 스님의 명복을 빕니다. 죽음은 생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생의 시작이라는 스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스님께서는 '온 몸으로 살고, 온몸으로 죽어라'는 어느 중국 선사의 말씀을 참 좋아하셨습니다. 스님의 일생이 그러합니다. 스님! 가시는 발걸음 부디 가벼우소서. '화엄경'의 선재동자도 만나시고, 어린 왕자가 사는 별나라에 가시어 원(願)을 이루소서. 한반도에 다시 오시어 못 다한 일들을 이루소서. 

작가 정찬주는 법정스님이 수행했던 암자와 절을 순례하며 우리들에게 자기만의 꽃을 피우자고 손을 내민다. 스님의 수행처를 다 순례하는 동안 나는 스님의 무소유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었다. 무아(無我)를 깨달으신 스님은 내게 늘 '나도 없는데 하물며 내 것이 어디 있겠는가' 라고 말씀하셨다. '귀 속의 귀'가 열려야만 들을 수 있는 가르침이다. 스님, 뵙고 싶습니다. 지금 어디 계십니까. 스님께서는 병상에서 누군가가 이제 스님을 어디서 뵐 수 있냐고 묻자, 불일암이나 길상사에 오면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다고 전해진다. 나는 그럴 수도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렇지 않아도 스님의 영혼이 행자실 툇마루에 앉아서 눈 내리는 허공을 응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스님이 입적하시고 한 달이 채 못 되어 송광사 불일암을 찾았다. 스님을 기리는 신도들이 불일암에 가득했다. 나처럼 더 늦기 전에 스님이 계시던 불일암에 가 봐야겠다는 막연함 마음으로 온 사람도 많았으리라. 연유야 어찌됐던 불일암을 찾은 사람들의 마음에 스님의 말씀을 하나쯤은 간직하고 돌아오리라 생각했었다. 정찬주 작가의 책, '그대만의 꽃을 피워라'는 스님이 입적하고 난 불일암에 갔던 그 마음을 다시 한 번 떠오르게 한다. 불일암의 사립문이며, 스님이 안아보고 하셨다는 후박나무, 스님이 직접 일구시던 채마밭, 그리고 빠삐용 의자 등 눈에 담아왔던 것을 책에서 다시 만나니 감회가 새롭다. '그대만의 꽃을 피워라'는 책 표지에 쓰인 문구처럼 마음 기행하기에 충분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