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부산메디클럽

[인문학 칼럼] 오로지 백성의 입장에서 보라 / 장희창

공직자의 도리는 권력 누리기보다 봉사하는 자리임을 가슴에 새겨야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0-09-15 21:02:31
  •  |  본지 27면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주소복사
  • 스크랩
  • 인쇄
  • 글씨 크게
  • 글씨 작게
   
이십여 년 전의 일이다. 난생처음 고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했다 황당한 일을 당했다. 사회자가 참석자들을 소개했다. "아무개 판사님 오셨습니다. 아무개 검사님 오셨습니다. 이만하면 됐지요? 이하 생략합니다." 아, 이렇게 촌스러울 수가. 그때 '이하 생략' 당했던 씁쓸한 기분은 아직도 남아 있다. 이후 다시는 동창회에 나가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판사와 검사라는 권력은 제법 대접받는다. 그 특권의식과 냉철한 거리를 두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일상화한 특권의식, 그것은 후진 사회의 명백한 증거다. 판검사에게 중요한 것은 명판결이고 큰 도적을 때려잡는 정의감이다.

딸 특채 사건으로 밀려난 외교통상부 장관의 처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소회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후회스럽다"고 답변했다. 공인의 입장에서 죽을 죄를 지었다고 해도 시원찮은 판에, 사적인 개인의 입장을 드러내며 이번 사건만 아니었으면 장관직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의 감정을 토로한 것이다. 얼마 전에 총리직에 지명되었던 어떤 인사는 의기양양해하며 "내가 여기까지 왔다!"라고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공직에 임해 그 책임을 생각하니 어깨가 무겁다고 말해야 할 자리에서, 그만 낯 뜨거운 장면을 연출하고 말았던 것이다.

왜 이렇게 권력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가? 공직을 봉사의 관점이 아니라 출세의 관점에서 보기 때문이다. 고위 공직에 진출한 이들이 위장전입, 병역기피, 부동산 투기를 일삼은 것도 출세지상주의의 당연한 귀결이다. 공직자로서의 도리는 제쳐놓고 권리만 누리려고 하는 권력 동물들의 행태는 프랑스어로 귀족의 의무를 뜻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원리와는 참으로 멀다.

14세기 백년전쟁 당시 프랑스의 도시 '칼레'가 영국군에 포위당해 패배했을 때의 일이다. 점령자인 영국 왕 에드워드 3세가 그동안의 반항에 대한 책임을 묻자 도시에서 가장 부유했던 자가 처형을 자청했고 이어서 시장, 상인, 법률가 등의 귀족들이 동참하였다. 이후 이 이야기는 서구 시민사회의 역사에 있어서 높은 신분에 따른 도덕적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 되었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조, 다산 정약용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원리를 보다 격조 있게 표현한다. 그는 '목민심서'에서 공직자의 도리를 이렇게 설파한다. '수령으로서 천박한 자는 관아를 자기 집으로 알아 오랫동안 누리려 한다. 그러나 현명한 수령은 관아를 여관으로 여겨 이른 아침에 떠나갈 듯이 늘 문서와 장부를 깨끗이 해두고, 항상 행장을 꾸려놓아 마치 가을 새매가 가지에 앉아 있다 훌쩍 날아갈 듯이 하고, 한 점의 애착도 마음에 품지 않는다'. 관직에 연연하지 않는 이런 공직자라면 애지중지하는 딸을 특채로 뽑아 자기 옆에 둘 리 없고, 총리직에 지명되었다고 뛸 듯이 기뻐할 리도 없을 것이다. 고시 합격을 가문의 영광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구절. '수령으로서 부모를 모신 자가 가끔 부모의 생신날에 풍악을 베푸는데, 자신은 이를 효도로 생각하지만 백성들은 이를 저주하기 마련이다'. 오로지 백성의 입장에서 보라는 말이다. 공사를 엄히 구분하라는 말을 참으로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다. 마음이 숙연해진다. 고전은 두고두고 읽어야 한다.
공직사회의 진입을 위한 각종 고시과목에 '목민심서'를 비롯한 지혜의 책, 고전은 필독서가 되어 마땅하다. 세계 최대의 고시촌임이 분명한 신림동 고시촌의 뜨거운 열기를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에너지로 바꾸려면 인문학의 기풍을 제대로 세워야 한다. 용광로처럼 타오르는 경쟁의 불길 가운데서도 연대와 공동체를 논하는 인문 정신은 싱싱하게 살아 있어야 한다. 육법전서만 달달 외우면 영혼 없는 권력기계가 될 가능성이 크고, 고전의 양식을 깊이 새기면 인간을 이해하고 아끼는 참된 공직자가 될 확률이 높다.

청문회에 나와 온갖 비리를 추궁당하면서도 관직에 연연하는 인사들은 다산의 심경을 헤아리기 어려울 것이다. 관직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홀가분함을 다산은 이렇게 말한다. '돌아가는 길에 토산품을 싣지 않고, 책수레만 가지고 돌아온다면, 어찌 맑은 바람이 길에 가득하지 않겠는가?'

동의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국제신문 공식 페이스북] [국제신문 인스타그램]
  • 기사주소복사
  • 스크랩
  • 인쇄

부산교육다모아
많이 본 뉴스 RSS
  • 종합

  • 정치

  • 경제

  • 사회

  • 스포츠

6·13 선거쟁점 지상토론
기장 해수담수화시설
주목 이 공약
여성 등 소외계층 분야 정책
강동수의 세설사설 [전체보기]
한반도에, 한국 정치에, 부산에 새바람이 분다
참담한 ‘재판거래’ 의혹, ‘디케의 칼’이 두렵지 않나
강동진 칼럼 [전체보기]
북항에 부산오페라하우스를 지어야 한다면
도심, 걸을 수 있어야 빛나는 곳
기고 [전체보기]
여성들은 백설공주를 꿈꾸지 않는다 /김영숙
평양옥류관 냉면 점심이 일상이 되기를 /이상준
기자수첩 [전체보기]
최저임금 인상의 역설 /이지원
침묵하는 민심, 왜 /이승륜
김용석 칼럼 [전체보기]
외교는 전쟁보다 어렵다
누구를 왜 존경할 것인가
김정현 칼럼 [전체보기]
납세자로서의 유권자
판사님, 내 그럴 줄 알았습니다!
뉴스와 현장 [전체보기]
부울경, ‘우리가 남이가’ /김희국
나는 통일, 걷는 지방분권 /유정환
도청도설 [전체보기]
개넋두리
폴 사이먼의 은퇴
문태준 칼럼 [전체보기]
설악당 무산 스님의 원적(圓寂)
개성 영통사와 금강산 마하연
박무성 칼럼 [전체보기]
6·13 이후
권력 사유화의 후과
박창희 칼럼 [전체보기]
서부산 신도시, 누구를 위한 것인가
高手의 질문법
사설 [전체보기]
재개된 남북 이산가족 상봉 이참에 정례화를
한러 정상회담, 남·북·러 삼각경협 구축 계기로
이상이 칼럼 [전체보기]
변화의 필요성과 소득주도 성장
고독사 문제의 근원적 해법
장재건 칼럼 [전체보기]
다시, 지방분권 개헌이다
양승태, 억울할수록 당당히 조사 임하라
특별기고 [전체보기]
갑질과 배려- 6년간의 부산상의 회장직을 떠나며 /조성제
걷고 싶은 부산 그린워킹 홈페이지
국제신문 대관안내
스토리 박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