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해 리버풀의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난 테렌스 데이비스는 전후 영국의 부흥기인 1950년대에 소년기를 보냈다. 소비주의에 물들기 시작한 영국은 새롭게 부상한 대중문화의 소비자인 10대 청소년이 그들의 문화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그가 보낸 청년기는 경제성장에 따른 부의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노동자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으며, 엄격한 가톨릭의 법과 폭력적인 아버지가 만든 규율에 갇혀 있던 때이기도 하다.

조용하고 수줍음 많았던 소년 데이비스의 기억은 26년간 7편의 장편영화를 통해 지금까지 계속된다. 그는 자전적인 요소가 많은 영화를 지속적으로 만들고 있는데, 3편의 단편을 묶어 완성한 '테렌스 데이비스 3부작'(1983)을 비롯해 '먼 목소리, 조용한 삶'(1988), '긴 하루의 끝'(1992), 다큐멘터리 '리버풀의 추억'(2008)에서 자신의 소년기와 청년기에 드리워진 가난과 폭력, 성정체성의 문제, 가족과의 관계를 깊게 들여다본다.

데이비스의 영화는 동시대 영국 주류 감독들과 완연히 다른 영화 세계를 만들었다는 특징을 지닌다. 리얼리즘 계열 영화들이 노동계급의 일상을 세밀하게 조명한다면, 그의 영화는 빛과 어둠이 빚어내는 움직임과 리듬만으로 기억과 시간을 직조한다. 소년기 기억은 어둠 속에서 슬그머니 다가오거나 과거와 현재가 서로 대화하듯 나란히 배치된다. 특히 목소리를 통해 환기되는 과거의 흔적이 이미지로 변환될 때의 숨 막히는 아름다움이나 아련한 슬픔은 데이비스만의 멜랑콜리와 노스탤지어를 품고 있기 때문에, 그의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깊고 적막한 아름다움에서 좀처럼 헤어나오지 못한다.

주제와 서사 구조보다 영화 매체의 근간인 이미지와 사운드 사용만으로 개인 삶과 주변과의 관계를 치밀하게 매만지는 데이비스의 미학적 특징은 기억과 감정을 재료 삼아 시를 쓰는 것처럼 아름답고, 여러 겹으로 벗겨낼 수 있는 정감으로 넘쳐난다. 특히 화면 바깥에서 들려오는 사운드를 통해 그의 미학이 압축된 것을 느낄 수 있다. 1950·60년대의 대중문화인 영화, 음악, 성가, 라디오 드라마, 가족이나 이웃이 모여서 부르는 노래가 관객에게 속삭이듯 들려오는 지점은 빛과 어둠으로 구성된 이미지의 세계뿐 아니라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들려오는 사운드를 통해 영화라는 매체의 시원에 도달하도록 이끌어준다.

그의 소리들은 이미지에 부수적으로 기입되거나 이미지와 상반된 기능을 수행하는 단순한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넘실거리는 음악은 그 자체로 데이비스의 마음에서 울리는 청아한 성가가 되고, 성정체성을 향한 질문에 빠져든 소년의 불안이 되기도 한다. 아름다웠던 가족의 애틋함이 묻어 있는 노래는 서로를 축하하는 감싸 안음이 되기도 한다. 즉, 그의 영화는 눈에 포착되고 마음에 새겨진 이미지와 귀에서 속삭이는 여러 가지 목소리 간의 대화 같다는 생각이 든다.

데이비스의 영화를 관람하면 타인의 기억과 시간이 나의 꿈처럼 전이되는 영화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다. 또 '영화적인 순간'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한 가지 대답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데이비스 영화는 오는 21일까지 영화의전당에서 만날 수 있다.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