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이 좋은 사람을 만들기도 하지만, 나쁜 사람이 그럴듯한 글로 세상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때로는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좋은 삶을 살겠다는 의지를 배반하기도 한다. 글과 사람, 혹은 글과 삶의 어긋남.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의 미묘함이란 성취하기 어려운 것을 이룩하려는 인간의 덧없는 열망에서 비롯된다. 글의 예술인 문학의 미학적 수준이란 것도, 대체로 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에 대한 성실성과 진정성을 둘러싼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문학은 단지 글쓰기의 미학적 수준으로만 판정되지 않고,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사유들을 아울러 요청한다.
글이 곧 삶을 대신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좋은 글로 자기의 불미함을 초월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완전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문학은 개인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도저한 의욕의 산물이다. 그렇지만 그 한계를 넘어서려는 인간의 위대한 열망과, 자기의 비루함을 떨쳐버리고 싶은 개인의 야욕은 구분돼야 한다. 대단히 이기적인 사람이, 심지어는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는 이들이, 공적인 의제 앞에서 정의를 소리 높여 외치는 사례들. 나는 그런 어긋남이 언제나 의아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이해가 된다. 그러니까, 자기의 현실로부터 동떨어질수록 그 말과 글은 더욱 고고하고 기괴해진다. 자기의 지난한 생활로부터 자유로운 이들이야말로 고고한 관념 속에서 마음껏 떠들어 댈 수가 있다는 역설. 다르게 말하자면, 뻔뻔한 사람 중에 고고한 사람이 많다.
내가 이처럼 어렵게 에두르는 것은, 한동안 떠들썩했던 신경숙의 표절 사건에 대해 다시 말하기 위해서다. 글은 말을 반성하게 하는데, 그 반성을 단지 언어에 국한하지 않고 자기의 실존이나 세상 이치로까지 넓혀가는 문장가를 나는 흠모한다. 그러나 오로지 글을 쓰는 자기를 만족하게 하는 미문의 글쓰기는 그 글쓰기의 치밀함과 세심함으로 사람을 놀라게 하고, 그 기예로써 경이로움을 불러일으키지만, 딱 그만큼에 머문다. 스타일이 곧 영혼이라고 했던 것은 장 콕도였다. 멋이 있으면 그만이라는 것이 아니다. 스타일을 창안하는 그 치밀함에 깃든 영혼의 순수함은, 결코 세상의 이치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 그러므로 그가 말한 스타일이란 오직 자기를 멋스러운 사람으로 고양하려는 그런 졸렬함과는 다르다.
신경숙이 옮겨다 적은 것은 미시마 유키오의 문장이었지만, 그것이 민망한 것은 그녀의 들켜버린 마음 때문이다. 한국의 최고 작가로 추앙받았던 그녀의 미문은 이번 일로 그 실체가 드러나 버렸다. 맛을 위해 요리 윤리를 배반하는 요리사처럼, 소설의 멋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소설가. 다른 작가의 미문을 옮겨 적었다는 그녀의 습작과정은 영혼에 대해 사유하기도 전에 스타일에 탐닉하는 초심자의 조급함을 드러낸다. 그것은 비단 신경숙이라는 한 소설가의 비루함을 드러낸 것으로 다가 아니다. 이번 사건이 진정으로 문제적인 것은, 한국 문학사에 끈질기게 이어져 왔던 어떤 비루한 욕망을 폭로해버렸기 때문이다. 그 욕망의 민낯이란, 영혼보다는 스타일을 추종해 왔던 바로 우리의 자화상이다.
우리들의 신경숙은 미시마 유키오의 그 우익의 이데올로기를 읽어낼 역량조차가 부재했던 것이다. 1936년의 이른바 2·26사건을 소재로 한 '우국'은 승전국 미국의 논리에 맞서 천황을 그 대항의 논리로 내세움으로써, 패전 후의 일본을 정신사적으로 재건하려는 미시마의 미학적 고투를 반영하고 있다. 그런 미시마의 존황사상과 내셔널리즘은 소설이라는 형식 안에서 농익은 에로티시즘으로 승화되었고, 실제로 1970년 도쿄 이치가야의 육상자위대에서 할복의 퍼포먼스를 수행함으로써 그의 문학은 미학의 정점을 찍었다. 신경숙이 미시마로부터 가져온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만 영혼을 괄호쳐버린 겉멋으로서의 스타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우리의 신경숙들이 옮겨와 자랑해온 그 미문들이란, 식민지배와 개발독재를 거쳐 주조된 압축근대화의 유치한 겉멋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신경숙의 표절을 둘러싼 논란들은 저 '영혼 없는 스타일'의 문제를 건드리지 못하고 겉돌고 있었다. 표절이라는 글쓰기의 문제는 도덕적 비난으로 쉽게 끝나버렸고, 이어서 문학장의 기득권 동맹에 대한 격앙된 분노로 들끓었다. 그래서 나는 부산에서 글을 쓰는 소설가, 시인, 비평가들과 함께 바로 그 문제를 다룬 좌담회를 기획했다. 좌담회가 끝나고 이어진 뒤풀이 자리에서, 부산의 소설가 조갑상 선생이 담담한 어조로 말을 한다. "우리가 다 신경숙이다." 절대 동감이다. 우리는 모두 저 영혼 없는 스타일에 이끌려온 압축근대화의 주인공들이었으니까.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