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를 통한 재현의 욕구는 오감으로 세상과 교유하는 인간의 본능이다.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자신의 삶을 재현할 수 없으며, 인간의 삶은 수많은 이야기를 통해 구성되고 확장된다. 인간은 이야기로 상상하고 선택하며 살아가기에 결국 인간의 삶 자체가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이고 이야기를 만드는 작가이며, 때론 그 이야기를 해설하고 주석을 다는 비평가가 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야기로 삶의 경험을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여 자신의 삶을 그려내고, 그렇게 그려진 삶이 다시 우리 자신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1980년대 후반 호주에서 시작한 이야기 치료(narrative therapy)라 불리는 심리치료 방법이 지금은 세계 곳곳에 널리 퍼져 있다. 이야기 치료는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었으나 잊고 있었던 것들을 이야기를 통해 발견하도록 돕는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모든 슬픔은, 말로 옮겨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에 관해 이야기를 한다면, 참을 수 있다"고 하였다. 누구나 일상에서 내 아픔을 이야기로 털어놓거나 누군가의 이야기에 공감하면서 놀랄 만큼 상처가 치유됨을 경험한다. 문학의 언어로 옮긴 이야기가 소설이다. 문학의 언어는 지식이나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문학의 언어가 빚어낸 이야기는 단순히 들려주기 위한 줄거리로서의 이야기가 아니라 섬세한 상징과 은유로 삶의 진리를 천착하는 이야기다. 소설은 인물과 사건을 중심으로 한 시간의 예술이며 시간의 불협화음을 화음으로 만들며 저자는 이야기를 만들고, 독자는 그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만든다.
무더운 여름, 연휴를 기회로 그동안 묵혀두었던 책을 읽었다. 그중에서 전성태의 소설 '이야기를 돌려드리다'는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 같아 오랫동안 가슴에 남았다. 소설 속 어머니는 치매를 앓는다. 치매는 가까운 기억부터 차근차근 갉아먹다 끝내 자신마저 망실하는 병이다. 어머니는 마치 휴대전화 액정화면의 배터리 표시처럼 기억이 지워진다. 구월의 기억이 지워지고 팔월의 기억이 지워졌다. 칠십 세의 기억, 육십 세의 기억이 사라졌고, 점점 어미로서의 기억이 사라지고 신부의 기억이 사라진 후 친정의 기억마저 지워졌다. 어머니는 아파트 출입문 비밀번호를 잊었고, 결국 아파트 동 호수마저 잊어 집을 찾지 못했다. 그런 어머니도 유일하게 반응하는 소리가 있다. 엄마! 하고 부르면 오야! 하고 대답하고, 밥 좀 줘! 하면,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다. 엄마와 밥은 마치 뇌에 저장된 기억이 아니라 가슴 같은 곳에 박히거나 뒤꿈치의 굳은살 같은, 기억과는 질적으로 다른 어떤 것 같았다. 자식들을 잊어도 엄마와 밥이라는 말에 정상인처럼 반응했기에 자식들은 면회할 때마다 엄마를 부르고, 밥 달라는 소리를 했다.
자식에 대한 기억이 없는 어머니를 더는 어머니라 부를 수 있을까. 모든 존재는 그 존재를 지켜보는 자의 기억으로 현존한다. 옛날, 어머니는 어린 아들에게 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여름이면 수박을 덩굴째 흙으로 묻어서 이듬해 봄까지 먹는다는 어느 섬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야기 말미에 자신이 하는 얘기들은 그저 신기한 얘기들이 아니라 모두 사실임을 강조하곤 했다. 아들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 악몽에 시달리지 않고 편안히 잠들 수 있었다. 아들은 어머니 무릎에 누워 계속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이야기가 바닥이 나서 더 해줄 게 없다고 어머니가 말하면, 아들은 예전에 들은 이야기들을 들먹이며 그것을 다시 해달라고 졸랐다.
이제 치매로 요양원 침대에 누운 노모 곁에서 아들은 이야기를 애써 떠올려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들을 돌려드린다. 어떤 미동도 없이 먼 세계에 있는 듯싶은 어머니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때면 한순간 어머니 눈이 반짝이는 것 같기도 했다. 어머니가 지금 열 살이 되었든 두 살이 되었든 아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리라 믿었다. 세상의 모든 아이는 이야기를 좋아하고 그 세계에 살고 있으니까.
책을 덮고 한참을 생각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나를 두고 사람들은 '지남철'이라 불렀다. 나는 출근하는 아버지 뒤를 자석처럼 따라붙어 아들을 떼놓고 출근하느라 아버지가 애를 먹었다. 심심했던 나는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이제 팔순의 아버지를 지켜보는 나는 육체의 노화보다 아버지의 기억이 점점 사라진다는 사실이 마음 아프다. 어딜 함께 다녀왔던 기억이 나는 선명한데, 아버지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어릴 때 신기하고 재미있었던 아버지의 이야기가 청소년 시절에는 지겨웠고 어른이 되어서는 반복된 이야기를 묵묵히 들었으나 기껍지 않았으며, 요즘은 바쁘다는 핑계로 아예 아버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못했다. 인간의 서사 본능, 즉 이야기를 만드는 본능이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든다.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청해야겠다. 언젠가 아버지의 기억이 희미해지는 날, 나는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들을 돌려드릴 것이다.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