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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교토 雜感(잡감) /전성욱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5-09-01 19:07:26
  •  |   본지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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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끝자락, 대학 개강을 앞두고 조금은 조급한 마음으로 일본의 고도 교토를 찾았다. 오사카 간사이공항에 내리자마자 낯선 이방의 냄새가 나를 반긴다. 여행에서의 이런 낯섦은 익숙한 일상에 길들여진 나의 상투적 감각을 일깨운다. 기차를 타고 교토 숙소로 가는 길은 어두웠고, 캄캄한 창 너머로 보이는 건 유리에 비친 나의 지친 얼굴이었다. 철골 구조 건축물로 위용을 뽐내는 교토역을 뒤로하고, 다시 지하철로 갈아탔다. 일과를 끝내고 귀가하는 이들의 피로한 모습을 보니, 객지의 어떤 낯섦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렇게 또 모두가 같은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창밖으로 교토고쇼(京都御所)가 내려다보이는 숙소의 아늑한 다다미방에서 곤한 첫날 밤을 숙면으로 보냈다.

제15호 태풍 '고니'의 북상으로 한반도에 거센 비바람이 불고 있을 때, 교토의 아침은 촉촉한 비로 적요했다. 맛도 상차림도 소박하고 소담한 일본 가정식 백반을 아침으로 먹고, 커피를 한 잔 마시며 잠깐의 여유를 즐긴다. 호텔 다다미와 일본 가정식 백반, 그리고 커피. 전통과 근대가 혼거하는 현대 문화는 이처럼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것들을 자연스럽게 한데 조화시킨다.

글로컬하다는 것, 그것은 낯선 것을 익숙하게 길들이거나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낯섦을 통해 일상의 진부한 감각을 일깨우는 조화이다.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에 안주하지 않는 것, 기꺼이 다른 낯선 것들을 반겨 맞으며 익숙지 않은 불편함을 견뎌내는 것. 그것이 글로컬이라는 신조어에 내재하는 진짜 함의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도시샤대학은 숙소 부근이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우산을 쓰고 도시샤대학으로 향했다. 제법 많은 사람이 자전거로 이동하고 있었다. 실상을 모르는 이방인 눈에는 그 모습이 살뜰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고목들로 잘 꾸며진 교정은 방학이라 그런지 호젓했다. 미션계 대학인만큼 오래된 예배당 건물을 비롯해 고풍스러운 건축물들이 인상적이다. 교정 한편에는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이 대학 영문과를 다녔던 정지용과 윤동주의 시비가 나란히 놓여 있다. 정지용의 시비에 새겨진 '가모가와(鴨川)'라는 시는 교토의 남북을 가로지르는 개천을 배경으로 고독한 유학생의 시름을 담고 있다. 나는 그 시비 앞에 서서, 오래전 식민지 본국으로 유학을 왔던 젊은이들의 어떤 심정을 가늠해 본다.

식민지 시기 총력전 체제의 사상적 기초를 제공했던 교토학파. 물론 그들의 '근대초극론'은 단순한 침략론이 아니다. 그런 사유가 창출되었던 교토대학을 찾았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이과대학의 건너편에 자리 잡고 있는 인문과학연구소는 건물 규모도 놀라웠지만, 로비 근처 게시판에서 확인한 그들의 연구 활동들은 무척 인상 깊었다. 특히 네 권이라는 방대한 분량으로 출간된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연구서는 부러웠다. 지난해는 제1차 세계대전 100주년이었다. 유럽에서 많은 기념행사가 있었지만, 일본에서 그것을 기념해 이런 방대한 연구서를 내놓았다는 것은, 우리 학계의 실정에 대한 반성은 물론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연구소 소장인 야마무로 신이치 교수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이후 동아시아에서 전개될 여러 사건과 사상의 분기점이라고 그 중요한 의미를 지적했다. 이런 연구는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범위 너머에 있다. 이런 연구를 가능하게 한 이 연구소의 저력을 생각해 본다. 교토역 앞의 대형서점에 들렀을 때도, 나는 '종전 70년'을 다룬 책들이 하나의 서가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3·11 이후에도 그랬지만, 사건을 사상화하는 일본 지식계의 활력과 저력은 대단하다. 중장기적인 의제를 기획하지 못하고 눈앞의 의제들에 급급한 우리 모습을 돌아보며, 한 잡지 주간인 나로서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교토대학의 여운은 긴카쿠지(銀閣寺)로 이어졌다. 강박적인 절제가 고도의 인공미를 생산하는 이 절 정원은 동아시아 정원의 비교문화사를 생각하게 한다. 특히 임제종 묘신지파의 사원 료안지(龍安寺)의 석정(石庭)은 오즈 야스지로의 '만춘'의 기억으로도 새삼스러운데, 오직 돌과 모래로 이뤄진 극히 단순한 조경 배치가 신비롭다. 나는 그 앞에서 선(禪)적인 것을 비롯해 어떤 맹렬한 해석의 욕구를 느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당돌함이 수그러들면서 담장과 그 너머의 나무들과 푸른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교토학파의 거두 니시다 기타로가 거닐었다는 '철학의 길'에서, 나는 다시 한 번 그것을 경험한다. 나를 내세우지 않을 때라야, 비로소 풍경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 짧은 여행에서 나는 너무 많이 생각하고 말았던 것이다.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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