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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거장은 떠나도, 오케스트라는 남아야 한다

남명숙 부산시의회 의원(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 남명숙 부산시의회 의원(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  |   입력 : 2026-10-08 15:3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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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7월 13일, 프랑스혁명 200주년을 하루 앞두고 혁명의 기억이 남은 바스티유 광장에 새로운 오페라극장이 개관했다. 당초 바스티유 오페라의 음악감독으로 예정됐던 다니엘 바렌보임은 이미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였고, 1975년부터 14년간 파리 오케스트라를 이끌며 지휘자로서도 국제적 명성을 쌓은 음악가였다. 그러나 바렌보임이 바스티유에서 물러난 뒤 파리 오페라는 뜻밖의 선택을 했다. 정명훈이었다.

피아니스트로 국제무대에 이름을 알리고 지휘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그에게 파리 오페라가 음악감독을 맡겼을 때, 그의 나이는 서른여섯이었다. 파리는 이미 완성된 또 다른 거장의 이름으로 빈자리를 채우지 않았다. 아직 보여준 것보다 보여줄 것이 더 많았던 젊은 지휘자에게 새 극장의 지휘봉을 건넸다. 그야말로 파리의 모험이었다.

정명훈도 그 모험에 자신의 시간을 걸었다. 바스티유 오페라 오케스트라와 작품을 만들었고, 세계적인 음반사 도이치 그라모폰은 그들의 시간을 기록했다. 1994년에는 정명훈의 지휘와 바스티유 오페라 오케스트라·합창단이 함께한 베르디의 ‘오텔로’도 세상에 나왔다. 새 극장과 오케스트라, 젊은 지휘자는 그렇게 함께 성장했다. 그리고 그 젊은 지휘자는 훗날 세계가 인정하는 마에스트로가 됐다.

37년이 지난 지금 부산에서도 묘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다. 부산은 2027년 오페라하우스 개관을 앞두고 정명훈이 지휘하는 이탈리아 라 스칼라 극장의 ‘오텔로’를 초청하는 계획을 추진해 왔다. ‘오텔로’ 세 차례를 비롯한 라 스칼라 초청 프로그램 전체 사업비로 약 105억 원이 거론됐고, 현재 부산시는 시민과 지역 예술계의 의견을 들으며 사업 추진 여부를 다시 검토하고 있다. 정명훈, 라 스칼라, 베르디의 ‘오텔로’. 마에스트로와 세계적인 극장, 오랜 세월 검증된 걸작의 만남이다. 개관 공연의 성공만을 생각한다면 이보다 화려하고 안전한 선택도 드물 것이다.

물론 부산오페라하우스의 첫 무대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열고 싶다는 생각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실패하지 않는 것이 새 극장의 유일한 목표일 수는 없다. 오페라하우스는 완성된 명품을 가져다 놓는 쇼윈도가 아니다. 새로운 해석이 태어나고, 이름보다 열정이 앞서는 예술가에게 무대가 열리고, 성공과 실패가 쌓이면서 마침내 자기 얼굴을 갖는 곳이어야 한다. 그래서 105억 원 규모의 초청사업을 바라보며 다른 장면도 그려본다. 막이 오르면 세계적인 성악가가 노래하고 마에스트로의 지휘봉이 움직일 것이다. 객석에서는 박수가 쏟아질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화려한 공연도 막은 내린다. 조명이 켜지면 관객은 돌아가고 초청받은 예술가들도 언젠가는 부산을 떠난다. 그렇다면 그 정도의 자원과 관심을 한 번의 찬란한 밤뿐 아니라 부산에 남을 음악의 시간을 만드는 데에도 투자한다면 어떨까. 부산에 뿌리내릴 오케스트라를 키우고, 그들과 몇 년을 부딪치며 부산의 소리를 만들어 갈 지휘자에게 시간을 주는 것이다. 한 작품이 끝나면 모두 흩어지는 극장이 아니라 다음 작품을 준비할 사람들이 남아 있는 극장.

부산에는 이미 세계적인 소프라노 조수미가 부산오페라하우스 홍보대사로 있고, 정명훈이라는 세계적인 마에스트로도 부산과 인연을 맺고 있다. 세계적인 이름 하나가 부족해서 부산오페라하우스가 빛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 필요한 것은 자신의 시간을 부산에 걸 사람인지 모른다. 1989년의 정명훈처럼 아직 이룬 것보다 이룰 것이 더 많고, 이름보다 열정이 앞서는 사람. 부산을 수많은 일정 가운데 하나로 두지 않고 이곳의 연주자들과 부딪치며 작품을 만들어 갈 지휘자 말이다.

지금의 정명훈은 1989년의 정명훈과 다르다. 세계가 부르는 마에스트로가 됐다. 그렇기에 부산은 오히려 물어야 한다. 새로 태어나는 극장에 가장 필요한 것은 가장 유명한 지휘자인가. 아니면 자신의 가장 뜨거운 시간을 이 극장에 쏟을 지휘자와, 그와 함께 성장할 음악가들인가. 그 이름을 지금 정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사람 한 명의 이름이 아니라 시스템을 남기는 일이다. 파리가 젊은 정명훈에게 건넨 것은 지휘봉만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함께 음악을 만들 오케스트라가 있었다. 젊은 지휘자에게 함께 성장할 오케스트라가 있었고, 오케스트라에는 자신의 시간을 쏟을 지휘자가 있었다.

부산도 그런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마에스트로 한 사람의 지휘보다, 부산에 뿌리내린 음악가들과 함께 성장하는 시스템. 10년, 20년 뒤 어느 쪽이 부산에 더 많은 것을 남길 것인가. 거장을 데려오는 데는 돈이 들지만, 거장을 만드는 데는 시간이 든다. 파리는 서른여섯의 정명훈에게 그 시간을 주었다. 그것은 모험이었다. 그리고 정명훈은 그 시간을 거장의 시간으로 바꾸었다.

10년 뒤 어느 저녁의 부산오페라하우스를 그려본다. 개관공연의 화려한 포스터는 빛이 바랬고 그날의 박수도 희미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무대 아래 오케스트라 피트에는 여전히 불이 켜져 있다. 부산에 뿌리내린 연주자들이 악보를 펼치고, 그들과 시간을 함께해 온 지휘자가 지휘봉을 든다. 어쩌면 그 지휘자는 그때쯤 우리가 자랑하는 또 한 명의 마에스트로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시간이 쌓여 어느 날 ‘부산의 소리’가 되는 것. 어쩌면 그것이 부산시민이 오랫동안 기다려 온 부산오페라하우스의 모습이 아닐까.

파리의 모험은 젊은 정명훈에게 거장이 될 시간을 주었다. 그렇다면 부산의 선택은 무엇을 남겨야 하는가. 박수는 멎고 마에스트로도 언젠가는 지휘대를 떠난다. 그러나 다음 날 오케스트라 피트에는 다시 불이 켜져야 한다. 거장은 떠나도, 오케스트라는 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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