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부산이 부산스럽다. 북극항로 시범 운항에 나선 컨테이너선이 부산을 출항, 북극해를 지나 22일 만에 유럽의 로테르담항에 도착했다. 새로운 항로의 개척과 함께 해양수도 부산의 중요성이 다시 국제적으로 부각되고 있다.
새로운 ‘항로’의 개척은 인류 역사에서 단순한 물류의 이동이 아니었다. 사람과 물자, 기술과 정보가 움직였고 서로 다른 문명이 만났다. 새로운 길은 곧 새로운 시대를 여는 길이었다. 우리에게 ‘대항해 시대’로 알려진 신대륙의 발견은 흥미롭게도 영어로 ‘The Age of Discovery(발견의 시대)’라 부른다.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면서 유럽인들에게 새로운 대륙이 알려졌고, 이후 사람과 물자, 동식물과 문화가 대서양을 건너 교차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콜럼버스의 교환(Columbian Exchange)’이라는 거대한 세계적 교류가 시작된 것이다. 옥수수 감자 토마토 고추 카카오 등 아메리카 대륙의 작물이 유럽과 아시아로 전해졌다. 반대로 밀과 쌀, 가축 등이 신대륙으로 건너가 지구 반대편의 삶을 바꿨다. 오늘날 우리의 식탁 역시 이러한 세계적 대교류가 남긴 유산이다. 한국의 김치에 없어서는 안 될 고추 역시 이 먼 항로를 거쳐 건너온 것이다. 만약 이 거대한 ‘발견과 교환’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의 삶과 식탁은 과연 어땠을까 상상해 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가 풍요와 발전만을 가져온 것은 아니다. 질병과 노예무역, 식민주의라는 어두운 역사도 함께 만들어냈다. 새로운 길은 누가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문명의 길이 되기도 하고 지배의 길이 되기도 했다. 식민주의는 발견이 인류의 욕심에 의존한 교환에만 머물렀을 때 나타난 병폐였다. 그리고 지금 인류는 또 하나의 거대한 전환점에 서 있다.
‘The Age of AI(인공지능의 시대)’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삶을 놀라운 속도로 바꾸고 있다. 생산과 유통은 물론 교육 행정 의료 예술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력은 빠르게 확장되고 있다. 그러나 기술의 속도와 효율성이 인간의 삶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인간에게는 숫자로 환산할 수 없는 관계와 공감, 기억과 감정, 그리고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만나 만들어내는 교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는 ‘The Age of Arts & Culture(문화예술의 시대)’가 필요하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능력을 확장하는 기술이라면, 문화예술은 인간의 가치를 확장하는 힘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예술을 통해 만나고, 차이를 인정하며 서로를 이해하게 한다. 이것이 다양성과 포용성에 기반한 교류와 협력이다.
과거 ‘발견의 시대’가 새로운 대륙을 찾아 물류와 자원을 교환했다면, 이제는 문화와 예술, 생각과 경험, 가치와 창의성을 교류하는 시대가 되어야 한다. 부산의 북극항로도 물류의 새로운 길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부산이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항로의 거점이 된다면, 사람과 물자의 이동을 넘어 문화와 예술이 오가는 도시가 되어야 한다. 새로운 항로가 물류를 연결한다면, 문화예술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또 하나의 항로다. 이것이 The Age of AI에 대응하는 문화예술의 시대 The Age of Arts & Culture의 진정한 의미다.
AI는 정보를 연결할 수 있지만 사람 사이의 공감과 신뢰까지 대신할 수는 없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기술이 아니라 인공지능과 함께 살아가는 인간의 문화적 역량이다. 서로 다른 문화와 생각이 만나고, 예술가와 시민이 교류하며, 도시와 도시가 협력하는 사회. 어쩌면 우리가 준비해야 할 새로운 시대의 모습은 바로 이런 풍경 아닐까.
1492년 이후 인류는 새로운 대륙을 발견하고 서로 간에 사람과 물자를 교류시켰다. 이제 우리는 또 다른 길을 열어야 한다. 정복이 아니라 교류를 위해, 지배가 아니라 협력을 위해, 획일화가 아니라 다양성을 위해.
북극항로가 부산과 세계를 잇는 물류의 길이라면, 문화예술은 부산과 세계를 잇는 인간의 길이 되어야 한다. 아시아 개항도시의 문화예술인들이 연결되고, 세계 해양문화도시들이 예술과 문화로 교류하고 협력하는 새로운 해양문화 네트워크를 부산에서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