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민정부 첫 청와대비서실장을 역임한 박관용 전 국회의장에게 '김영삼 전 대통령(YS)은 한마디로 어떤 사람이었나'라고 묻자 돌아온 답변이다.

박 전 의장이 기억하는 YS는 강단있는 지도자였다. "목숨을 건 단식을 결정, 23일간 계속할 수 있다는게 쉬운일 인가. 26세에 국회의원에 당선돼서 민주화투쟁을 40여년간 계속했던 분이다. 그러는 동안 자기집과 재산도 다 내팽개치고, 아들은 취직하나 못하는 고통속에서 연금은 또 몇번이나 당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치의 굴함이 없이 불굴의 신념으로 군사정권과 싸우지 않았나. 전두환 정권 등 역대 정권들의 그 많은 회유와 권력의 협박에도 단 한 번도 굴복한 적이 없었다. 끝까지 자기주장을 했다. 23일간 목숨을 걸고 단식하는 용기와 결단을 본 권력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얼마나 두려웠겠나. 자기 신념이 너무나 확고했고, 타협과 비굴은 있을 수 없었다".

이런 강단과 용기가 대통령 당선후 일관되게 밀어붙인 개혁의 밑바탕이 됐다는게 박 전 의장의 회고다. 박 전 의장이 기억하는 김 전 대통령은 중요한 결정에 앞서 많은 의견을 듣고 엄청난 고민을 하지만 일단 결심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가는 스타일이었다. "그 양반은 중요한 결심을 할때는 창가에서 팔짱을 끼고 한참을 생각한다. 그 양반이 청와대에서 팔짱을 끼고 창가에 오래 서 있으면 내가 수석들한테 '야, 대통령 일저지르려 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나회 숙청이나 금융실명제 실시 등 숨가쁘게 몰아친 일련의 'YS 개혁'들은 이같은 오랜 고심끝에 탄생했다는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 참모들에게 "신한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개혁을 할 수 밖에 없고, 그런 개혁을 추진할테니 적극 뒷받침해달라"고 간단하게 언급한 후 곧바로 개혁작업에 착수했다고한다.

첫 국무회의에서 자신의 재산(17억7000만원)을 공개하고, 장차관들에게도 재산을 공개토록 했다. 장차관들은 까무러칠듯이 놀랐고, 본격적인 개혁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박 전 의장은 "당시 '소방호스를 입에 들이댄 것 같다'고 말하곤 했다. 한건이 들어오면 꿀꺽 마시고, 마시면 또 꿀꺽 들어오고…".

박 전 의장은 "이 양반의 개혁은 혼자서 깊이 생각하고, 결단을 내리면 밀고 나간다. '10원 한장 안받겠다'고 선언할때 내가 가서 말렸다. '그러면 중앙당 운영자금(당시까지는 대통령이 당 총재)은 어떻게 하고, 군부대 방문시 격려금 등 돈이 들어갈 곳이 많은데 어떻게 할려고 하십니까. 청와대에는 그런 경비가 없습니다'라고 했더니 '하면된다'고만 얘기하시더라"면서 "그후 명절과 연말에 군부대를 방문했을때 내가 얼마나 민망한지…. 중앙당에서도 불평이 많았는데 '자급자족해라. 방법이 없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하나회 숙청과 금융실명제 단행때는 김 전 대통령의 주도면밀함에 감탄했다고 했다.

정권인수위원회에서 제1분과위원장을 맡았던 박 전 의장이 당선자 신분이었던 김 전 대통령에게 독대를 신청, 하나회의 문제점을 보고하자 "나도 다 파악했다"면서 '절대 함구'를 지시했다. 그후 군 개혁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었고, 인수위 보고서에 조차 포함되지 않았다. 물론 당선자의 의중이었다.

하지만 청와대에 들어간 직후 김 전 대통령은 아무런 예고없이 권영해 국방부 장관을 불러 두시간 반만에 현역 육군참모총장을 해임하고 후임자를 결정한 것을 시작으로 하나회 척결은 '전광석화'처럼 시작됐고 마무리됐다.

김 전 대통령은 중요한 결정에 앞서 참모들의 의견을 물어볼때는 직접적으로 물어보기 보다는 '쓸쩍 떠보는 식'이었다고 한다. "금융실명제 어떻게 생각해"와 같은 식으로.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이 "지금은 적기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가 실명제 추진 과정에서 '물 먹었던' 사실은 유명하다. 비밀유지를 위해 청와대 경제수석까지도 제외시켜버렸던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비서실장에게는 실명제 실시 준비사실을 설명하면서 "이 얘기를 아는 사람은 청와대안에는 당신 밖에 없다. 만약 발설되면 당신이 한 걸로 알고 책임을 묻겠다"고 '협박'조로 얘기했다고 한다.

그런 YS도 차남 현철씨 만큼은 마음대로 하지 못했고, 상도동 핵심들 조차 현철씨 문제에는 함구로 일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박 전 의장은 "시중에 현철씨 얘기가 나돌때 고민을 거듭하다가 '김 소장(그때는 그렇게 불렸다)과 관련한 소문들이 있는데, 각하 통치에 누수의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만큼 대책이 필요하다'면서 '유학'을 염두에 두고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면서 "하지만 '걔가 무슨 잘못을 했느냐'라고 구체적으로 하문하시면 대답할게 없습니다. 저한테 올라오는 어떤 보고에도 김 소장에 대한 내용은 없습니다라고 말했는데 듣고만 계셨다. 심기는 상당히 불편해보였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며칠후 김 소장이 박 실장의 공관으로 전화를 걸어 "아버지한테 내 얘기를 하셨습니까. 뭐라고하셨습니까"라고 물었고, 난감했던 박 실장은 "나는 대통령을 모시는 비서입장이요. 비서가 모시는 어른께 한 얘기를 외부에는 안한다는게 내 원칙이요. 당신과 아버지는 부자지간이니까 아버지께 물어보는게 낫지 않겠소"라면서 전화를 끊었으나 내심 불쾌했다고 한다.

박 전 의장은 "나중에 알고보니 대통령께서 아들에게 '너 이놈, 행동조심하라고 했는데 씰데없는 짓하고 돌아다니지마라'고 경고했고, '아버지 성격을 닮은' 현철씨는 발끈하면서 '제가 뭘 잘못했느냐'고 따지자 김 전 대통령은 '내가 박 실장한테 다 들었다'라고 말했던 것으로 전해들었다"고 말했다.

박 전 의장은 "김 전 대통령은 둘째아들 현철씨에게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면서 "대통령 선거 여론조사 기법을 동원한 장본인이고, 조직관리도 많이 했을뿐 아니라 아버지한테 괜찮은 진언도 했기에 굉장한 사랑을 베풀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통령 임기중에 그런 아들이 구속되자 김 전 대통령은 엄청난 상심에 빠졌다. 박 전 의장은 "아버지(고 김홍조옹)는 '아들 구속시킨 사람이 무슨 대통령이고'라고 하지, 부인(손명순 여사)은 연일 눈물을 흘리지, 사랑하는 아들은 구속이 되었지, IMF 사태는 닥쳤지 하루하루가 얼마나 힘이들었겠느냐"라면서 "그때 건강이 나빠졌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박 전 의장은 "김 전 대통령이 얼마나 권력의 탄압에 시달렸나 하면, 직선제 개헌 투쟁때 내가 한번은 대여투쟁과 관련한 중요한 얘기를 할게 있다고 하니까 차에 태워서 라디오를 '왕 왕'할 정도로 크게 틀어놓고, 귀에다가 말하라고 하더라"면서 "그렇게 체질적으로 완벽한 보안을 지키면서 투쟁에 목숨을 걸었던 사람이다. 그 사람이 싸워서 오늘날 절차적 민주주의를 성공시킨 것이다. 그런데 아직 우리나라 국회나 정치인들은 서로 대화나 타협없이 갈등만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김 전 대통령은 실질적이고 성숙된 민주주의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은퇴한 것을 굉장히 안타깝게 생각해왔다"라면서 "그래서 통합과 화합이란 글씨를 쓰고 떠났다. 그분이 진정 원하는 것은 여야가 대화하고 타협하고 통합하는, 그런 진정한 성숙된 민주주의였고, 그것이 그분의 유훈이다. 정치권이 이제 새롭게 거듭나는 정치를 했으면 좋겠다는 그런 뜻을 남기고 갔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한다"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