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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미와 새끼 해표가 다정하게 마주보며 서로의 숨결을 느끼고 있다. |
- 영하 35도 장보고 기지 인근엔
- 추위에 가장 강한 웨델 해표 서식
- 두꺼운 지방층·지느러미로 변한 팔
- 극한 환경서 생존 위해 진화한 모습
- 송곳니로 숨구멍 뚫어 천적 피해
남극 장보고과학기지 해빙(海氷) 지대를 지나는데, 얼음 위로 지름 50㎝ 남짓한 구멍이 여럿 보였다. 해표 숨구멍이다. 남극대구 등 어류를 사냥하는 포유류 해표는 물속에서 오랜 시간 버틸 수 있지만, 숨은 물 밖에서 쉬어야 한다. 얼마나 지났을까. 해표 한 마리가 숨구멍을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 순진해 보이는 큰 눈을 물 밖으로 내민 채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이방인을 발견하고 잠시 멀뚱멀뚱 쳐다보지만, 이내 경계심을 버리고 얼음 위로 올라왔다. 어미 뒤를 따라 새끼 해표가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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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보고과학기지 인근 해빙지대의 얼음 숨구멍으로 해표가 머리를 내밀고 있다. |
남극의 여름이 시작되는 11월이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끼 해표를 흔하게 발견할 수 있다. 아직 젖을 물고 있는 새끼부터 젖을 떼고 막 수영을 배우기 시작하는 녀석까지 바닷가 곳곳에는 해표들이 모여 있다. 어미 해표는 새끼가 젖을 뗄 때까지는 수영을 가르치지 않는다. 남극 바닷속의 차가운 물에서 버티려면 통통하게 젖살이 올라야 하기 때문이다. 얼음 위로 올라온 어미와 새끼는 큰 눈을 껌벅이다가 스르르 잠에 빠져 들었다. 서로의 숨결을 느끼려는 듯 얼굴을 비비며 마주한 표정이 세상 부러울 것 없이 행복해 보였다. 기자는 이들의 평화와 행복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물속 세상에 대한 미련이 남았을까. 해표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느 기각류와 마찬가지로 지느러미로 변한 팔은 물속 활동에는 도움을 주지만 육상에서는 몸을 지탱할 힘이 없다. 숨구멍까지 엉금엉금 기어 왔지만, 여름철에도 영하 20도까지 곤두박질치는 장보고과학기지가 위치한 남극 빅토리아랜드 테라노바만 연안의 추위에 숨구멍은 가장자리가 얼어 버렸다. 얼음 구멍을 넓히기 위해 어미 해표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얼음에 박은 채 머리를 좌우로 돌리기 시작했다. 꽁꽁 얼어붙은 얼음이 가루가 되어 날리고 구멍은 조금씩 넓어졌다. 거침없는 해표의 동작이 마치 대형 보링 머신이 뿜어내는 강력한 파워를 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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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미 해표가 얼어붙은 숨구멍을 이빨로 갈아 넓히고 있다. |
한동안 작업이 끝나자 몸이 들어갈 정도의 공간이 확보됐다. 어미가 먼저 물속으로 들어가 새끼를 부른다. 아직 수영이 익숙하지 않은 새끼가 주저하지만 어미의 재촉에 미끄러지듯 얼음 구멍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어미 곁에 바짝 붙은 새끼는 어미의 몸짓 하나하나를 배우며 혹한의 남극에서 혼자 살아갈 준비를 한다.
지금부터 3000만 년 전 곤드와나 대륙이라는 거대 대륙에서 분리된 땅덩어리가 지구 남쪽 끝까지 떠 내려와 만들어졌다는 남극 대륙. 아마 대륙에 갇혀 있던 많은 동식물은 연평균 영하 23도와 초속 22.2m에 이르는 강풍, 평균 두께 2300m까지 쌓이기 시작한 눈에 파묻혀 멸종을 맞았을 것이다. 원시 남극 대륙에 존재하던 동식물들이 멸종을 맞은 증거는 1969년 남극 종단 산맥에서 발견된 송아지 크기만 한 공룡인 리스트로사우루스 화석과 남극 곳곳에서 발견되는 나무 화석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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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미해표가 자신을 따라 들어온 새끼해표를 반기고 있다. 박수현 기자 |
불행 중 다행으로 해안가로 내려온 일부 동물은 극한 환경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했다. 이들은 적응이라는 유전자 속에 학습을 본능으로 삼아 오랜 세월을 버텨왔을 것이다. 펭귄과 더불어 남극을 대표하는 해표는 원시 포유류에서 분화된 후 헤엄치기에 알맞도록 팔 대신 지느러미를 가지게 되고, 혹한의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조밀한 털로 덮인 피부 아래에는 두꺼운 지방층을 가지게 됐다. 또한 물속에 머물 때는 코로 물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콧구멍이 닫히는 구조로 진화해 갔다.
해표류는 세계적으로 18종이 분포한다. 이중 남극권에서 발견되는 해표류에는 웨델(Weddell) 크랩이터(Crab eater) 표범(Leopard) 코끼리(Elephant) 로스(Ross) 해표가 있다. 남위 62도에 위치한 남극 세종과학기지 인근 해역에서는 웨델 크랩이터 표범 코끼리 해표를 관찰할 수 있지만 겨울이면 영하 35도까지 곤두박질치는 장보고과학기지(남위 74도) 해역에는 웨델해표가 주종을 이룬다. 아마 웨델해표가 추위를 견디는 내성이 가장 강한 것으로 보인다. 이뿐 아니라 웨델해표는 송곳니로 해빙에 구멍을 뚫을 수 있다. 장보고과학기지 인근 바다는 해빙으로 온통 덮여 있기에 숨구멍을 스스로 뚫지 못하는 남극의 절대 포식자 표범해표나 범고래가 들어오지 못한다. 그래서 웨델해표는 천적을 피해 더 추운 남쪽으로 내려오게 되었을 것이다. 웨델해표는 몸길이 2.5~3m에 체중은 400㎏가량이다. 웨델이란 이름은 남극을 탐험한 영국 탐험가 제임스 웨델(JAmes Weddell 1787~1834)에서 따왔다.
남극 장보고과학기지=박수현 기자 parksh@kookje.co.kr
※이 기사는 극지 진출 30주년을 기념해 부산시 지원을 받아 취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