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0년 몸담던 교직 내려놓고
- 락희화학 입사 사업가의 길로
- 자체 금형기술로 성장 큰 역할
- 1995년 스스로 회장직 내려놔
- 학생 위한 과학관·대학설립 등
- 인재 양성에 투자 아끼지 않아
- 1964년 국제신문 경영 참여
- 5대 종합일간지로 키우기도
지난 14일 별세한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은 그룹의 실질적인 공동 창업주였다. 부산사범학교에 재직하면서 낮에는 학생을 가르치고 밤에는 락희화학공업사에서 ‘동동 구리무’라 불렸던 럭키크림의 생산 현장에서 창업주인 아버지 구인회 회장을 도왔다. 고인은 경남 진주시 지수초등학교에서 2년, 부산사범부속초등학교에서 3년간 교직에 몸담았는데 학교 규율을 중시해 ‘호랑이 선생님’이라 불렸다. 제자였던 신상우 전 국회부의장은 “체육시간에 호루라기를 불며 구령을 붙이는데 그 모습이 하도 엄해 우리는 벌벌 떨었다”고 회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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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G화학 부산 연지동 공장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구인회 (왼쪽부터) 창업회장, 구평회 창업고문, 구자경 명예회장(세 번째), 구자두 LB인베스트먼트 회장. LG 그룹 제공 |
구 회장은 사업이 번창하자 교직을 접고 1950년 락희화학에 입사했다. LG그룹은 “구 명예회장은 당시 이사라는 직함에 어울리지 않게 직접 가마솥에 원료를 붓고 불을 지펴 크림을 만들었다. 밤에는 하루 걸러 숙식하며 오전 5시 30분이면 몰려오는 도매상을 맞았다”고 전했다.
구 회장은 락희화학과 금성사 부사장에 오르는 동안 부산의 범일동 공장, 연지동 공장, 온천동 공장 등 시설 확장의 중심에 서 있었다. 창업주 아들로서는 드물게 20년 동안 현장 경험을 쌓았다.
구 회장은 락희화학에서 플라스틱 가공 경험을 쌓았고 자체 금형기술 확보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훗날 금성사(LG전자 전신)의 성장에 큰 역할을 했다. 축적된 금형 역량을 바탕으로 라디오 선풍기 모터 등 높은 정밀도를 필요로 하는 전자제품의 금형기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는 고향 진주와 제2의 고향 부산에 많은 애정을 쏟았다. 1999년에 지수초등학교가 학생 수 부족으로 통폐합 위기에 몰리자 당시 총동창회장이었던 그는 1999년 6, 7월 두 차례 모교를 찾아 학교 시설 건립비 11억 원을 기부하고 전입 희망 학생 늘리기에 나섰다.
교사 출신인 그는 LG그룹의 모태였던 연지 공장 터에 과학관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과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려 노력했다. 그는 1998년 부산진구 연지동에 300억 원을 투자해 ‘LG 청소년과학관(현 LG사이언스 홀)을 개관했다. 당시 고인은 직접 개관식에 참석했다. “LG의 모태인 연지동에 청소년을 위한 첨단 과학관을 만들겠다”는 꿈을 실현하는 과정이었다.
LG그룹의 전신인 럭키그룹은 1964년 국제신문 경영에도 참가했고 1980년 신군부가 정론지 폐간 작업 때 국제신문이 희생될 때까지 국제신문을 국내 5대 종합일간지로 키웠다. 당시 발행인이었던 구자경 명예회장이 보안사에 끌려가 눈물을 흘리며 국제신문 포기 각서를 썼던 일화는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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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년 6월 부산 부산진구 연지동에 소재한 LG 사이언스홀 개관식 때 직접 방문한 고 구자경 명예회장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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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회장은 1973년 학교법인인 LG 연암학원을 세웠다. 낙후된 농촌의 발전을 이끌 인재를 양성한다는 취지로 1974년 충남 천안에 연암대를 설립했으며 1984년에는 경남 진주에 연암공업대를 건립했다. 특히 두 대학이 소수정예 특성화 대학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설립 초기부터 지원과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이와 함께 고인은 건축가 고 김수근 씨가 설계했던 자신의 서울 종로구 원서동 사저를 기증해 1996년에 모든 문헌 자료를 디지털화한 국내 최초의 전자도서관을 개관했다. 자신의 아호를 딴 LG 상남도서관이다.
구 회장은 70세였던 1995년 경영혁신의 일환으로 경영진의 세대교체가 필요하다고 결심하고 은퇴를 선언했다. 고인은 1995년 2월 이·취임식장에서 “끊임없는 변화와 혁신이 요구되는 이 시점에서 여러분을 믿고 나의 역할을 마치고자 한다”고 말했다. 정옥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