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빈이 100년 전부터 임대주택에 집중한 이유는 역설적으로 주거난 때문이다. 1세기 동안 임대주택 정책을 유지한 빈은 현재 유럽에서 ‘임차인의 천국’으로 불린다.
20세기 초까지 오스트리아는 극심한 주거난에 시달렸다. 노동자 계급은 열악한 환경의 좁은 공간에서 생활했다. 층당 수도꼭지와 화장실이 하나밖에 없고, 월세 수입을 높이려고 한 침대를 여러 명에게 임대하는 상황도 벌어졌다. 극도의 조밀한 주거 구조는 위생에 취약했고, 전염병이 유행하기도 했다. 특히 결핵은 유럽 중 빈에서 가장 많이 발생해 ‘빈 병’이라고까지 불렸고, 노동자 계급에서 일파만파 번졌다.
그러던 1918년 1차 세계대전의 끝과 함께 왕정이 몰락했다. 이후 처음 시행한 빈 시의원 선거에서 사회민주주의 정당인 사민당이 승리했고, 이듬해 야콥 로이만(Jakob Reumann)이 시장으로 선출됐다. 로이만은 임기 시작과 동시에 주거 건설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왕과 귀족만 주택을 소유하던 시대에 서민도 집을 가질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1923년 빈 시의회는 2만5000가구의 주택 계획을 세웠고, 1925년 빈 최초의 시영주택 ‘메츨라인스탈러 호프’가 지어졌다. 건폐율이란 개념이 없었지만 빛과 공기, 햇볕이 있는 주거 단지를 표방했다. 결핵은 멈추고, 위생 문제가 해결됐다. 1933년 20만 명이 임대주택에 거주하게 됐다. 그렇게 100년이 흘렀다.
빈 시민은 임대주택에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부모·조부모 모두 임대주택에 살았으니 자신도 그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빈 젊은건축가협회 이병훈 건축가는 “빈은 한 동네와 건물 안에 자가와 임대가 섞여 구분되지 않으니 굳이 비싼 집을 살 필요가 없다”며 “많은 시행착오와 갈등이 있었지만 이제 ‘문화’가 됐다”고 말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취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