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가문은 40여명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대한독립운동사의 축소판인 셈이다.
그러나 독립운동 서훈자는 안 의사와 동생 정근·공근 형제, 사촌 명근·경근, 조카 봉생·춘생·원생·낙생, 안명근의 매제 최익형, 안춘생의 부인 조순옥 등 11명에 그치고 있다. 안 의사의 친동생인 안성녀 여사도 빠져 있다. 그동안 안 의사 가문에 대한 연구가 미진한 탓이라고 할 수 있다.
안 의사의 가족들은 1909년 안 의사의 의거후 고향인 황해도 신천을 떠나 두만강을 건너 북만주로 망명했다. 안 의사의 모친 조마리아 여사와 동생 정근(1885~1949)·공근(1889~1940·이상 독립장) 형제를 비롯해 사촌들도 비슷한 시기에 집단 이주했다. 그러나 1911년 여름 안 의사의 맏아들 분도가 러시아에서 일제 밀정에게 독살당하는 비극을 맞게 된다.
연해주에서 독립운동 기반을 마련하던 정근·공근 형제는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가족들을 데리고 상해로 떠났다. 안정근은 독립군 모집과 주요 연락업무를 책임졌다. 안정근의 부인 이정서(1957년 사망) 여사도 만석꾼의 딸로 태어나 독립군 가문으로 시집가 일제 탄압을 피해 베트남까지 50차례나 이사를 다닌 파란만장한 인생의 주인공이다.
안정근 선생의 며느리 박태정(75)씨는 "시어머니는 셀 수도 없을 만큼 친정에서 독립자금을 끌어다 조달했으나 자신의 공적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던 훌륭한 분"이라고 회고했다. 안정근의 차녀 안미생씨는 김구 주석의 비서를 지내다 훗날 김구의 며느리가 됐고, 해방후 안 의사 가문 중 가장 먼저 귀국했다.
안공근도 임시정부에 들어가 백범 김구의 최측근으로 활동했다. 1936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상임 국무위원으로 선임된 이래 1940년까지 임시정부 의정원 황해도 의원으로 활동했다. 안 의사의 사촌인 안경근(1896~1978)은 상해와 남경을 돌아다니며 군관생도를 모집하는 임무를 맡았다.
안중근의 조카인 안봉생(1908~1980)은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벌이다 붙잡혀 1945년 8월17일자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다행히 사형 집행일 이틀전 해방이 돼 목숨을 건졌으며, 1990년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안봉생의 동생 안춘생(93) 전 독립기념관장은 중국 육군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육군소령으로 광복군에서 활동했다.
안중근 연구의 최고봉으로 불리는 국제한국연구원 최서면(79) 원장은 "안 의사의 가문에서 수십명이 독립운동에 투신했음에도 독립운동 서훈자가 11명에 그친 것은 학계의 연구가 부진한 탓"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특히 "누구나 안 의사의 손도장에 대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자른 손가락은 어디 있는지 밝혀지지 않았다"며 "사료 발굴과 현장 조사를 통해 가족사 등 각론 연구가 활성화돼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