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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존 독립지사 이길영(78)선생.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뜻을 이어 받아 광복군에 입대했다가 해방을 맞았다. 박수현기자 parksh@kookje.co.kr |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은 대물림되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군과 맞서 싸우는 '아버지의 길'을 자녀들도 함께 걸었다.
삼엄한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비밀을 유지하는데도 가족만큼 안전한 조직은 없었다. 독립운동사에서 아버지는 총칼로 싸우고 아들은 군자금을 조달하고 딸은 문서 운반책으로 활동한 사례를 자주 볼 수 있다.
그러나 가족 또는 1~3대가 동시에 독립유공자로 지정되는 사례는 매우 드물다. 특히 1920~1930년대 항일운동을 한 순국 지사의 경우 증빙자료를 찾기가 어려워 역사에 파묻힌 경우가 허다하다.
1990년 독립운동을 한 공로로 애족장을 서훈 받은 이길영(78·부산 영도구 동삼동) 선생 가문은 전국에서 몇 안되는 3대가 독립운동 서훈을 받은 가문이다.
이 선생 위로 조부 이규풍(1865~1932·애국장) 지사와 선친 이민호(1895~1944·애족장) 지사가 자랑스런 독립투사였다.
이 선생이 서훈받는 과정도 사연이 깊다. 이 선생은 "항일운동은 당연히 할 일이며 자랑할 게 못된다"며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독립운동 사실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다 1998년 국가보훈처의 끈질긴 설득에 못 이겨 뒤늦게 조부와 선친에게 추서된 훈장을 전수받았다.
이 선생은 또 조부와 선친의 호주 승계권자에게 주는 독립유공자 유족 연금도 2003년이 돼서야 받았다.
"연금은 장손이 승계하는 것이 원칙인데 나는 4형제 가운데 막내야. 러시아와 만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형 3명과는 해방전 소식이 끊겼어. 혹시 그분들이 돌아오실까 봐 연금 승계권을 신청하지 않았지." 이 선생은 결국 2003년 형들의 호적을 정리했다.
이 선생이 기억하는 선친은 '낮에는 의사, 밤에는 독립투사'였다. 선친은 중국 베이징에서 지하활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잡혀 심한 고문을 받고 풀려 났을 때 베이징 대학생들이 입으로 선생의 피고름을 빨아낼 만큼 존경을 받던 분이었다.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1919년 3·1운동 당시 황해도 전라도 충청도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추진하다 결국 일본 경찰에 체포돼 평양형무소에서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 1922년 러시아로 망명해 구국운동을 했으며 1932년 베이징으로 건너가 병원을 개업하고 지하공작을 계속하다 또 다시 체포돼 1944년 5월 끝내 순국했다.
이 선생은 "조부 이규풍 선생은 어릴 때 별세하셔서 기억이 없다. 하지만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 선생이 '형님'이라고 부르며 극진히 대접했다는 일화가 전해질 만큼 독립운동사에는 알려진 인물이다"고 말했다.
조부는 1909년 안중근, 이범윤 선생과 함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의용군을 조직해 회령과 경원에서 일본군을 대파하는 혁혁한 공을 세운 바 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이 선생은 1945년 3월 김학규 장군 휘하의 광복군에 입대해 훈련을 받고 동남아전쟁에 미군 통역병으로 투입되기 직전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후 한국전쟁때 부산으로 내려와 한전과 내무부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이 선생의 고향인 충남 아산에는 3대의 독립운동을 기린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 선생은 "독립운동할 때 권력 얻기를 바라고 한 것 아니야. 민족이 해방돼야 모두가 잘 살 수 있다는 신념 때문이었지. 요즘 정치인들도 생각을 고쳐 먹어야 해. 군림하려 들지 말고 고개를 숙여야 나라가 일어서는 법이다"고 말을 맺었다.
사회1부 광역이슈팀
신수건기자 giant@kookje.co.kr
이노성기자 nsl@kookje.co.kr
배성재기자 passion@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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