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집 토담 너머에 물맛 좋은 우물이 있었다. 물을 길어 아침밥을 지으려는 동네 아낙네들이 우물가로 모였다.
어느 날 수도가 놓여 우물 뚜껑이 닫혔고, 긴 끈이 달린 두레박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역사와 문화, 삶의 지혜와 의미를 품고 어딘가에 내팽개쳐져 있을 '두레박'을 찾아 말을 거는 시리즈를 격주로 연재한다.
첫 이야기는 '동래부의 장려한 낙일(落日)'이다.
1873년(고종 10년) 4월, 용두산 아래 초량왜관의 수문(守門) 벽에 방이 나붙었다. 왜인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에 방을 붙인 건 적극적으로 알리겠다는 의도였다. 문체가 자못 비장했다.
'초량왜관의 일본인들이여! 그대들은 성신지교로 300여 년간 이어온 교린을 파기하고 이상한 행동과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루아침에 풍모와 관습을 바꾸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가…. 대마도가 조선과 교역해온 것은 옛날부터 정해진 불변의 약속이다. 최근 일본인들의 행동을 보면 무법의 나라가 아닌가…. 조선에는 조선의 법령이 있다. 우리는 이 법을 우리 땅인 초량왜관에서 실시할 뿐이다. 지금부터라도 약속한 대로 행동하겠다고 하면 지금까지 잘못을 용서할 것이다'.
보낸 곳은 동래부였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고 당시 초량왜관에 와 있던 일본의 외무성 7등 출사 히로쓰 시로노부가 본국에 이 내용을 급보했다. 그해 6월 일본 정부는 각의에 '조선사건'을 상정했다. 일본 정부의 서계(書契·외교문서) 접수를 1868년부터 4차례나 거부한 조선을 그냥 두면 안 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사이고 다카모리 등 일본정부 내 강경파들은 대놓고 조선침략 정책, 즉 정한론(征韓論)을 들먹였다.
동래부의 꺾일 수 없는 자존심의 표현인 '동래부 전령서'가 정한론의 마중물이 된 꼴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