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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 가는 야생동물을 찾아서 <6> 멧돼지

번식이 생존 위협하는 아이러니…인간과 공존의 길 찾아야

  • 백한기 선임기자
  •  |   입력 : 2015-05-06 19:00:34
  •  |   본지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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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강원도 철원군 한탄강에서 해가 질 무렵 갈대숲에 숨어 있던 멧돼지 무리가 먹이를 찾아 강을 건너고 있다.
- 천적 사라져 개체수 급증 '무적'
- 먹이 부족해 종족보존마저 위태

- 취재팀 벽송사 조명설치 잠복
- 절에서 공양하고 남은 음식 보시
- 가족 데리고 경계선채 허기채워

- 도심까지 진출한 건 인간의 책임
- 산아래 구릉 동물·사람 완충지대
- 개발로 고유 생활영역 야금야금

- 저돌적 공격 유해짐승은 오해
- 겨울·초봄 먹이 부족 혹독한 시련

야생의 세계는 이미 멧돼지의 세상이 돼버렸다. 현재 국내 산천에서 멧돼지를 공격할 수 있는 맹수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천적이 사라진 이 땅에서 이제 멧돼지는 천하무적이다. 불행이도 멧돼지는 생태계 내에서 개체 수를 조절 받을 기회를 잃은 셈이다. 그 결과 개체 수는 크게 늘었고 먹이는 부족해졌다. 종족 번식이 곧 자기 생존을 위협하는 상황이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나라 멧돼지들의 비극인 것이다.

멧돼지 한 마리가 무인센터 카메라 앞으로 지나고 있는 모습.
경남 함양군 마천면에 있는 벽송사 원돈 주지 스님으로부터 제보를 받았다. 해 질 무렵이면 어김없이 멧돼지들이 먹이를 찾아 사찰 앞 텃밭에 몰려든다는 것이다. 취재팀은 야간 생태를 확실하게 관찰하기 위해 멧돼지가 모습을 드러내는 먹이터에 야간 조명을 설치하고 잠복에 들어갔다. 야생동물 중에서 특히 후각과 청각이 발달한 멧돼지 관찰을 위해 취재팀은 멀리서도 조정 가능한 특수 촬영장비를 설치하고 기다렸다.

주지 스님의 제보대로 멧돼지는 모습을 드러냈지만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잠시 후 또 한 마리가 나타났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다른 멧돼지들이 뒤를 따르고 있다. 몸집이 작은 어린 멧돼지가 있는 것으로 봐서 멧돼지 가족이었다.

멧돼지들은 천천히 주변을 살피더니 이내 음식물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곧이어 또 다른 멧돼지들이 나타났다. 아마도 숨어서 지켜보다가 더는 위험이 없다고 판단되자 모습을 드러낸 것이 분명하다. 멧돼지 수가 6마리로 늘어났다. 그들은 아주 빠른 속도로 음식물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15분 정도 지났을까. 웬만큼 배를 채웠는지 유유히 산으로 사라졌다.

멧돼지가 먹이 부족으로 자주 출몰하는 곳에 보살이 먹이를 주고 있다.
멧돼지들이 벽송사를 찾게 된 것은 2년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와 관련 절 공양 간 보살의 증언. "음식물 쓰레기가 조금씩 없어졌어요. 날이 갈수록 그 양이 점차 늘었어요. 어느 시점이 되니까 음식물 쓰레기가 거의 없더라고. 저를 비롯한 절식구들 모두가 궁금해 저녁때부터 각자의 위치에서 지켜보니 주범은 멧돼지였어요."

원돈 주지 스님의 허락으로 그때부터 절에서 멧돼지에게 음식을 주기 시작했다. 일이 더 늘어난 공양 간 보살은 이에 개의치 않고 되레 성의를 다해 먹이 주기에 여념이 없다.

먹이는 주로 제를 올리고 남은 각종 떡과 공양하고 남은 음식물이 대부분이지만 공양 간 보살은 철마다 신선한 과일을 먹이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먹이뿐 아니라 멧돼지의 안전에도 신경을 쓴다. 여유가 있을 땐 혹 마을 사람들이 쳐놓았을 법한 올무를 제거하기 위해 절 주위를 돌아다닌다. 그것도 모자라 행여 올무 등으로 해코지를 당하지 않았나 걱정하며 음식을 먹는 멧돼지들의 머릿수를 헤아리기도 한다.

어두운 밤 멧돼지 두 마리가 먹이를 먹고 있는 모습이 적외선 무인센서 카메라에 잡혔다.
지리산 둘레길 초입에 있는 벽송사 앞 텃밭 양지바른 터에는 매일 저녁 4~6마리의 멧돼지 떼가 어김없이 나타난다. 이렇다 보니 야생 멧돼지들은 냄새만 맡고 보살을 알아보며 도망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공양 간 보살은 "매일매일 야생 멧돼지들을 보다 보니 이제는 모든 야생동물이 사람과 한데 어울려 사는 세상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며 "멧돼지들이 벽송사를 찾아오는 한 먹이 주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멧돼짓과에 속하는 멧돼지는 가축화된 돼지의 조상 종이다. 돼지가 탈출해 산으로 도망치면서 새끼를 낳아 한 세대 만에 자연에 적응, 온순한 가축에서 사나운 맹수로 돌변했다. 고기의 식용도 가능해 사육하기도 한다.

몸길이는 1~1.8m, 어깨높이는 0.45~1m, 몸무게는 100~300㎏ 정도. 원뿔형인 머리는 몸통과 구별이 확실하지 않다. 네 다리는 짧고 가늘며 겉보기와는 달리 아주 빠르다. 몸색은 어두운 갈색에서 엷은 갈색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아시아 멧돼지는 머리 꼭대기에서 등 중앙부에 걸쳐 긴 센털이 많이 나 있지만, 유럽 멧돼지는 털이 그다지 발달해 있지 않다. 또 아시아계 멧돼지에는 윗입술로부터 볼에 걸쳐 흰털의 선이 있으나 유럽계의 멧돼지에는 그렇지 않다.

황소만 한 멧돼지 한 마리가 먹이를 찾아 이동하는 모습.
최근 멧돼지가 도심까지 출현,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거나 농부들을 공격해 상처를 입히는 사례가 종종 늘고 있다. 무엇이 멧돼지가 도심을 활보하며 인간을 공격하게 했을까. 상위 포식자가 없어 개체 수가 늘어난 까닭도 있겠지만 가장 큰 책임은 역시 인간에게 있다.

인간이 들어와 살기 전까지 숲은 야생동물의 터전이었다. 인간이 차츰 그 생활 영역을 넓히면 야생동물의 영토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산 아래 잡목으로 이뤄진 구릉지는 야생동물과 사람과의 완충지대인 셈이다. 이 완충지대를 인간이 개발하고 그 영역을 확장함으로써 자연스럽게 평화가 깨지고 분쟁은 시작됐다. 고갯마루를 절단내 도로를 만들면서 동물들의 이동을 차단한 것도 또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이동 통로를 잃은 동물들은 도로로 나올 수밖에 없다. 최근 빈번한 로드킬이 이것을 입증하고 있지 않은가.

경남 함양군 마천면 국립공원 동식물보호구역은 원래 수렵이 제한되는 곳이다. 하지만 지난 2월 총을 든 엽사들이 이 안으로 들어와 덩치 큰 사냥개 6~7마리를 앞세워 유해동물을 잡느라 산 곳곳을 휘젓고 다녀 동물들의 서식지가 파괴돼 단속이 시급하다. 이 지역은 반달가슴곰, 담비, 오소리, 너구리, 노루 등이 서식하고 있는 곳이다.
'저돌적'이라는 말이 있다. 성난 멧돼지가 들이닥치듯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멧돼지는 의심도 많고 겁도 많다. 평소엔 사람을 발견하면 먼저 피하는 순한 녀석이다. 짝짓기 때와 새끼를 데리고 다닐 때만 사람을 공격한다. 짝짓기 때 갑자기 등장한 사람은 암컷을 해치려는 대상으로 인식하고 공격하는 게 멧돼지의 습성이다.

천적이 사라진 땅에서 이제 멧돼지에게 위협은 오로지 자신들뿐이다. 겨울과 초봄은 어느 동물에게나 혹독한 계절이다. 그러나 대식가인 멧돼지는 아무리 혹독해도 봄이 되면 어김없이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킨다. 이 땅의 야생 멧돼지들은 당분간 어떤 시련이 온다 해도 그 질긴 생명력을 유지해 나갈 것이다. 독자 여러분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010-8516-3298)

취재 협조 = 원돈 벽송사 주지 스님·김용만 함양군청 기획감사실· 김동규 조류사진가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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