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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희 대기자의 말하는 두레박 <3> 이병주 다시읽기

'섭리의 맷돌은 서서히 갈되 가늘게 간다'…필화로 옥살이 후 '소설의 산하' 개척

  • 박창희 대기자 chpark@kookje.co.kr
  •  |   입력 : 2015-05-19 18:54:42
  •  |   본지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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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필로 지역언론 황금기 이끌어
- 황용주 주선 박정희와 술친구로
- 본지 1961년 신년사설 '통일에…'
- 용공 올가미에 언론인 생활 마감

- 獄苦로 내면의 玉稿 끄집어내
- 한 달 평균 1000매 원고 집필
- 선생의 문학열 머문 공간
- 부산에 빗돌 하나쯤 세워야

'말하는 두레박'이 나림(那林) 이병주(1921~1992)를 선택한 건, 그가 국제신문을 거쳐간 논객인 점이 알게 모르게 작용했다. 팔이 안으로 굽었음을 고백한다. 그렇다고 거기에 묶여 이병주를 다시 읽지 못한다면 그것도 온당한 자세가 아닐 터. 그를 재조명하는 것은 한국 언론의 혼, 한국소설의 맥, 자유 인간의 초상을 찾는 일이다. 부산이 그동안 나림을 모른 척 잊어온 게 더 문제다.



#지리산 가는 길

이병주의 필화사건을 야기한 1961년 1월1일자 '국제신보' 1면의 신년 사설. 다시 읽어도 감동적인 명사설이다. 이로인해 이병주는 2년7개월 간 복역했다.
지리산이 성큼 다가온다. 섬진강이 길동무하고 있다. 나림을 찾아가는 길이다. 지리산은 우렁찬 산맥과 연봉들의 기세를 꺾어 한 살림 이룰 터전을 전개하고 하동을 품안에 들였다. 지리산 골짝의 산물을 모아 흘러가는 섬진강, 이 유순한 강의 하구가 막히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가. 흐르지 않았다면 지리산이 겪어야 했던 아픔을 누가 씻었겠는가.

이병주 문학관은 하동군 북천면 직전리, 이명산((理明山·572m) 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오호라, 이치에 밝은 산이 세상 이치를 깨우치는 대작가를 낳았구나. 나림은 이명골의 물을 먹고 하동 북천초등학교를 다녔다. 책 보따리를 메고 개울에서 멱 감고 고기 잡으며 뛰놀던 그때가 나림의 인생 최고 시기가 아니었을까.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젊었을 때 일제의 학도병으로 끌려 갔고, 5·16 때는 필화사건으로 옥살이까지 한 그였고 보면, 굴곡진 인생사에 어찌 회한이 없으랴. 그의 호 나림은 '어떤 숲', 곧 고향의 나무와 숲을 뜻한다. 이병주 문학관은 고향을 챙긴 작가에게 고향이 안겨준 보답이라고 할까. 그래선지 이곳의 햇빛 달빛 바람 돌멩이 물소리 하나 하나가 예사롭지 않다.

문학관 입구에는 나림이 사용하던 펜을 형상화한 만년필 두 개가 일주문처럼 서 있다. 어두워지면 불이 들어온다. 낮엔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필화(筆花)요, 밤엔 어둠을 밝히는 필화(筆火)다. 펜의 아름다움이자 펜의 뜨거움일 터인데, 그것이 가혹한 필화(筆禍)를 불러왔으니 펜의 지극한 회한이다.



#격동의 시간들

혁명의 시대였다. 1960년 4월19일 학생들이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며 들고 일어났다. 세상이 바뀌나 싶었는데, 그 이듬해 5·16 군사 쿠데타가 터졌다. 고민하던 언론들은 쿠데타를 지지한다. 이 즈음, 국제신문(당시 국제신보)의 이병주 주필 겸 편집국장과 부산일보 황용주 주필 겸 편집국장은 쿠데타 주역인 박정희를 만나 교분을 유지한다. 1960년 초 박정희가 군수기지사령관으로 부산에 부임하면서 황용주의 주선으로 박정희-황용주-이병주 '트리오'가 엮어졌고 막역한 술친구로까지 이어졌다. 세부적 경위와 교류 내용에 대해서는 갖가지 주장과 증언, 추측, 억측이 난무하지만, 꽤 긴밀한 관계가 유지됐던 건 틀림없다. 일본 유학, 학병 징집, 언론계 활동 등 공통분모가 많았던 이병주와 황용주는 부산 경남의 '주필시대'를 열며 지역언론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박정희와 각별한 사이였던 황용주가 5·16 모의자 중 한 사람이라는 건 알려진 비밀이다.

그런데 난데없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병주는 1961년 5월 20일, 황용주는 5월 21일 각각 경찰에 체포된 것이다. 이들의 체포는 쿠데타에 관여한 군인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자유당 정부 시절 경찰과 누적된 불편한 관계 때문이란 분석이 설득력이 있다. 두 사람 모두 다분히 형식적으로 이름을 올렸던 교원노조 고문이란 전력이 문제가 됐다.

이들이 잡혀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 박정희의 개입으로 황용주는 한달 만에 석방되었지만, 이병주에겐 용공 혐의라는 무서운 올가미가 씌워졌다. 신문 사설과 잡지 기고문이 뒤늦게 문제가 된 것이다. 이병주는 그해 10월 30일 혁명재판소의 판결로 10년 징역을 선고받고 2년 7개월 간 복역한다. 그나마 감형이 된 데엔 황용주의 역할이 있었다고 한다.



#꺾이지 않은 필봉

혁명재판부가 지목한 글은 국제신문 1961년 1월 1일자(석간) 1면에 통단으로 다룬 '통일에 민족역량을 총집결하자'란 신년 사설이었다. 필화를 부른 역사적 사설이라 부분 인용한다.

'…국토의 양단을 이대로 두고 우리는 희망을 설계하지 못한다. 민족의 분단을 두고 어떤 포부도 꽃필 수 없다. 같은 국토를 갈라 놓고 총과 총이 맞서 있다. …북한과의 접촉을 곧 공산화에의 위험으로 느끼는 사고방식처럼 인순고식(因循姑息) 한 건 없다. 민주주의의 정신, 민주주의의 신념에 그처럼 자신을 갖지 못하고 어떻게 복지국가 건설의 웅도(雄圖)를 펼칠 수 있단 말인가. …통일 논의에 관한한 언론과 결사에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한 연후에 국민의 진의를 투표 형식으로 물어보게 하자. 어쨌든 통일에 관한한 우리는 위정자에게만 맡겨둘 수가 없다. …이 아담한 강토가 하나의 판도로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나라들처럼 복된 민주주의를 키워 그 속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 민족의 슬기를 세계 만방에 빛내고 싶다. 이렇게 되기 위한 준비의 시간으로서 1961년을 활용해야 한다. 통일을 위해서 민족의 전역량을 결집하자. 이 비원 성취를 위해서 민족의 정열을 결집하자!'

서릿발 같은 논조가 가슴 북을 울린다. 다시 읽어도 감동을 주는 명사설이다. 언론이라면 응당 할 소리요, 주장을 담은 글이 용공의 먹잇감을 찾는 혁명재판부에 덥썩 걸려들고 말았다. 혁명재판부는 1960년 12월 '세대'지에 실은 이병주의 '조국의 부재(不在)'란 칼럼에도 같은 혐의를 씌웠다. 이 글에 나오는 '내게는 조국이 없다. 산하만 있을 뿐이다'란 대목은 이병주 아포리즘의 한 절정이다.

이병주 필화사건은 한국언론사에 지워지지 않는 기록이다. 이 시기에 필화가 많았던 건 박정희의 좌익 콤플렉스와 무관하지 않다. 계엄사령부는 1961년 5월 민족일보의 용공 논조를 문제삼아 발행인 조용수 등 3명을 사형시켰고, 1962년 8월 동아일보의 '국민투표는 만능이 아니다'라는 사설을 문제 삼아 주필과 논설위원을 구속했다. 필화는 있어서 불행한 것도, 없어서 다행한 것도 아니다.



#거대한 산하

1955년 국제신문에 입사해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눈부시게 활약한 이병주의 언론계 생활은 필화사건과 함께 사실상 정리된다. 이병주에게 옥고(獄苦)는 그의 내면에 갈무리된 옥고(玉稿)를 끄집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출소 직후 그는 자신의 필화 경험을 바탕으로 원고지 500장 분량의 중편소설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발표한다. 반향이 컸다. 여기서 작가는 신기한 섭리를 깨닫는다.

'섭리란 묘한 작용을 한다. 갑의 죄에 대해서 을의 죄명을 씌워 처벌하는 것이다. 격언 그대로, 섭리의 맷돌은 서서히 갈되 가늘게 간다. …나는 비로소 이곳에 내가 있어야 할 이유를 알았다. 불효한 아들이었다. 부실한 형이었다. 부실한 애인이었다. 불성실한 인간이었다…'

옥살이를 변곡점으로 이병주는 한국소설이 미처 닿지 못한 영역을 개척한다. 그가 남긴 '지리산' '산하' '그해 5월' '관부연락선' 같은 대하소설은 그 자체로 한국소설의 거대한 산하를 이룬다. 등단 이후 1992년 지병으로 타계할 때까지 그는 한 달 평균 1000매의 원고를 써낼 정도로 초인적 집필력을 과시했다. 그의 소설은 웅혼한 스케일과 박진감 넘치는 구성, 재미까지 더해져 지금까지도 고정 독자가 적지 않다.

생전에는 '인간' 이병주가 늘 화제였다. 전 언론인 남재희는 한 회고글에서 "이병주는 '잡놈'이다. 결코 나쁜 뜻이 아니다. 도덕 무도덕 비도덕 부도덕의 모든 차원을 넘나들며 만물상과 같은 친근감을 준 사람"이라고 술회한 적 있다. 이병주를 만나 본 사람들은 하나 같이 그의 박람강기와 박학다식에 놀랐다는 경험을 늘어놓는다.

작품과 글을 통해 남긴 이병주 어록은 그의 또다른 진면목이다. "역사는 산맥을 기록하고 나의 문학은 골짜기를 기록한다." "역사는 사실(fact)을 모아서 거짓을 말하기도 하지만, 문학은 허구로서 진실을 말한다." "태양에 바래지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이병주는 갔고 그 역시 산하가 되었다. 산하에 어룽지는 달빛처럼 그에 대한 기억은 날이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그의 고향인 하동에 문학관, 섬진강가에 문학비, 서울 북한산 기슭에 어록비가 있다지만, 부산에 뭔가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쉽다. 부산은 그의 청춘의 열정과 도전, 문학을 향한 고뇌가 머문 공간이다. 이곳이 어찌 차마 잊힐리야. 부산에 그를 기리는 빗돌 하나쯤은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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