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여 년 쉼없이 걷고 쓰며
- 75권의 방대한 저서 집필
- 옛길의 역사적 가치 제대로
- 모르고 있는 현실 안타까워
- 삼남·영남·관동 조선의 3대 대로
- 되밟으며 의미 찾는 대장정 중
- 원형 보존된 영남대로 작원잔도
- 훌륭한 교육자료이자 문화재감
- 부산 오륙도~고성 통일전망대
- 국내 최장 탐방로 '해파랑길'
- 스페인 산티아고 부럽지 않은 길
- 통일 향한 콘텐츠로도 손색 없어
책 속에 길이 있다고 했던가. 이 말은 '우리땅 걷기' 신정일(61·사진) 이사장에겐 '길 위에 책이 있다'로 바꿔야 맞을성 싶다. 그동안 길 위에서 쓴 책이 75권이고, 현재 4권을 동시에 집필 중이다. 앞으로도 수십 권은 더 쓸 요량이란다. 무서운 집필력이다.
신정일 이사장은 한마디로 걷기 도사다. 도사(道士)가 도를 갈고 닦는 사람, 도통한 사람을 뜻할진대, 그는 실제로 길을 갈고 닦는데 모든 걸 걸었다. 걷고 쓰고 먹고 자고, 걷고 쓰고 먹고 자고…. 30여 년 간 이러다보니 어느날 도가 툭 터지더란다. 그가 얻은 도의 다채로운 양상들은 그의 책에 알알이 박혀들어 있다. 4대 강 도보 답사기나 '새로 쓰는 택리지'(총 10권)같은 저서는 직접 다니지 않으면 쓸 수 없는 책들이다.
■옛길 복원 방송 다큐 진행자로
이달초 그가 부산에 또 걸으러 왔다. 이번에는 KTV가 기획한 옛길 복원 프로젝트 '옛길, 시간을 걷다'(연출 백수완)의 진행자 자격이다. 지난 5월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삼남대로(전남 해남~한양 숭례문), 영남대로(부산 동래~한양 숭례문), 관동대로(울진 평해~한양 흥인지문) 등 조선시대 3대 대로를 답사하며 그 속의 역사와 문화, 삶을 캐는 다큐멘터리다. 30분짜리 총 20회로 기획됐다.
신 이사장의 행장은 가벼워 보였다. 흰 개량 한복 차림에 운동화를 신었고 배낭과 카메라 하나를 달랑 둘러맸다. 동래 온천장에서 만나 악수를 하자 그에게서 햇볕 냄새 비슷한 게 풍겨왔다. 오래 걸은 사람에게서 풍기는 향기 같았다. 사람의 향기는 코로만 전해지는 게 아니라, 눈과 손, 몸짓, 느낌을 통해서도 전해진다는 것을 알았다. 마라톤 선수처럼 가볍고 강인한 몸에서 풍겨나는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향기. 그 향기를 맡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사람을 만나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건 부담이 없다는 얘기요 교감이 된다는 말이다. 마음이 편안해지자 우리는 오래 알아왔던 지기처럼 금세 도반(道伴)이 되었다. 그가 말했다. "도반, 즉 길 동무는 좋은 말이에요. 마음 통하는 도반을 만나 걷는 것은 행복한 일이죠."
■ 다시 영남대로 위에 서다
--이번에도 영남대로를 걸을려고 하십니까?
"다큐멘터리의 특성상 걷지 않으면 그림이 안 된다고 하네요. 걸은 곳을 다시 걸어라 할 때도 많죠. 영상을 찍으려면 어떡하겠어요. 10여년 전 영남대로를 한번 완전히 걸어본 적이 있기 때문에 겁날 건 없어요. 빨리 걸으면 17일, 18일이면 가요."
-옛길이 남아 있긴 합니까?
"거의 없죠. 대부분 도로로 변했죠. 무심한 도로, 한심한 정부예요. 옛길이 얼마나 소중한 문화재인데 지킬 생각조차 못하고 있으니까요. 조선 3대 대로 중 관동대로에는 그마나 옛길이 제법 남아 있어요. 지금이라도 챙기지 않으면 영영 없어져요."
-옛길이 문화재가 된 사례가 많나요?
"몇 개 있죠. 영주의 죽령, 문경 토끼비리, 대관령 옛길, 문경새재 옛길, 문경~충주 하늘재, 홍천~양양 구룡령 옛길이 모두 문화재예요. 제가 걸으면서 떠들어댄 효과가 있었던가 봐요. 다행한 일이죠."
-영남대로(황산도) 중 작원잔도(鵲院棧道) 같은 것은 재평가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양산 원동과 삼랑진 사이에 있는 작원잔도는 낙동강 벼랑길로 의미 있는 옛길입니다. 자연훼손 없이 벼랑에 석축을 쌓은 모습이라든지, 주변 경관과 어우러져 원형이 잘 보존돼 있기 때문에 충분히 문화재감이 되죠. 옛길을 설명하는 교육자료로 이만한 게 어디 있겠어요."
다시 옛길 위에 섰지만, 현실은 녹록치가 않다. 사람들은 보이는 길, 좋은 길, 편한 길만 찾으려 할뿐, 길의 흥망성쇠나 역사적 고뇌를 읽으려 하지 않는다. 그것이 길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 길 위에서 얻은 산지식
체율체득(體律體得)이라 했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깨우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옛사람들은 책상머리에서 익힌 문사철(文史哲)을 체득하기 위해 산천으로 나가 유람하기를 즐겼다. 자연이 곧 경전이었다. 그 경전을 몸으로 읽기 위해선 걸을 수밖에 없었다. 걸어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도(道)인 것이다.
그러한 도에 이르는 길이 역사 속에 묻혀 있었다. 신 이사장은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나 '택리지'를 쓴 이중환, 방랑시인 김삿갓 같은 역사인물들을 도반으로 불러냈다. 이들이야말로 당대 최고의 걷기 고수들이었다. 이들이 걸어간 길들은 우리가 지금 찾고 있는 옛길이요 오늘날의 인문학, 지리학, 지역학, 풍속학의 바탕을 이룬다.
사람들은 신 이사장을 '현대판 김정호' '21세기 이중환' '신 삿갓' 등으로 부른다. 역사 걷기의 유전(流轉)이랄까. 걷기 마일리지로 보면 신 이사장은 김정호나 이중환, 김삿갓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을 것 같다. 신 이사장은 한국의 10대 강 도보 답사와 동해안 해파랑길을 답파했고, 400여 개의 산들을 올랐다. 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소개된 조선의 10대 옛길 중 남한에 있는 것은 다 걸었고, 들어갈 수 없는 북한의 옛길만 미답으로 남아 있다.
여태까지 걸은 길이 줄잡아 약 20만km. 그가 걸은 길들의 상당수는 지자체의 탐방로가 되었거나 아름다운 걷는 길로 거듭났다. 국내 최장거리 탐방로인 '해파랑길'(총 연장 770㎞)은 그가 2009년 문화체육관광부에 동해 트레일로 제안한 길이다.
당시 부산 오륙도에서 대장정의 첫발을 뗄 때 그는 "동해안을 따라 통일의 길을 열겠다"는 포부를 밝혔었다.
신 이사장의 최종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에게 길은 세상과 만나는 장소였고 학교였다. 독학을 통해 그만의 공부법을 터득했고, 수많은 책을 읽고 세상을 주유하면서 남다른 창의력과 상상력을 길렀다. 그가 쓴 75권의 책 대부분은 길 위의 산지식으로 채워져 있다. 출신 학교, 출신 학과가 중요한 기준이 되는 시대라지만, 그것이 그에겐 거추장스러운 가방일 뿐이다.
그는 오늘도 변함없이 걷는다. 2003년 그가 설립한 도보 단체 '우리땅 걷기'는 전국의 걷기 마니아들로 구성된 답사 모임이다. 회원이 1만2000명이다. 매달 4차례씩 주제를 잡아서 걷는데, 행사 때마다 100~300명씩 모여든다. 지금은 휴전선을 구간별로 걷고 있다.
■길의 중심 부산, 원대한 꿈을 꿔라
신 이사장은 동래읍성과 온천장의 온정개건비를 둘러본 뒤 본격 영남대로 대장정에 나서면서 길에 대한, 부산을 위한 한가지 제안을 했다.
"부산이 갖고 있는 힘으로 통일의 길을 열어젖히는 겁니다. 해파랑길이 있잖아요. 부산 오륙도 앞이 기종점 아닙니까. 청소년 대학생 통일선봉대를 꾸려 해파랑길을 따라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걷고 북한을 부르는 겁니다. 압니까, 북한이 휴전선 철문을 열어 두만강까지 가게 할지…."
부산은 지정학적으로 대륙과 해양의 접점이면서 길의 요충지다. 영남대로의시종점, 경부선과 경부고속도로의 시종점, 7번·2번 국도의 시종점, 그리고 아시안 게이트웨이다. 길 콘텐츠와 관련해 얼마든지 원대한 프로젝트를 발신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부산 오륙도~강원도 고성을 잇는 해파랑길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장거리 트레일이다.
신 이사장은 "비싼 돈 주고 스페인 산티아고 길을 갈게 아니라, 우리 국토를 뜨겁게 만날 수 있는 영남대로나 해파랑길을 가야 한다"면서 "정부에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내놓고 통일 논의에 불을 지피고 있으니 부산에서 체험적 통일 담론 하나를 띄워보라"고 제안했다.
"모름지기 꿈은 커야 합니다. 통일전망대를 넘어 북한의 동해안을 따라 나진 선봉을 거쳐 두만강 녹둔도, 더 나아가서는 시베리아를 관통하고 유럽을 지나 저 아프리카 남단 케이프타운까지 걷는 꿈이라야 꿈 답다고 하지 않겠어요."
신 이사장의 시야는 한반도를 넘어 저 푸른 만주벌판을 걷고 있었다.
chpark@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