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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기장의 근대적 여학교인 명정의숙 1회 졸업식 모습. 1910년대 지역 항일운동의 근거지가 되었던 곳이다. 이 학교 학생들이 독립운동가 구수암의 장례를 면민장으로 이끌었다. |
- 기장 3·1운동 주도 구수암
- 일제 고문 탓에 숨지자
- 명정의숙 학생들 면민장 이끌어
- 항일투사 권은해가 제문 읽어
- 동래고 출신 김성조의 훈장
- 뒤늦게 학교 역사관으로 전수
- 독립운동 활발했던 부산
- 조명은커녕 기념사업 미미
- 역사 잊고는 미래 없어
■ 구수암 만가
1920년 5월초, 부산 기장 읍내에서 슬프디 슬픈 만가(輓歌)가 울려퍼졌다. 구수암(具壽巖)을 떠나보내는 슬픈 노래였다. 평범한 청년인 구수암은 기장 3·1 운동을 주동한 혐의로 1년 6개월의 형을 받고 대구형무소에 복역하다 가석방된 지 3일만에 죽었다. 일제가 가한 전기고문과 심한 구타 탓이었다. 나이 21살, 꽃다운 청춘의 허망한 종막이었다.
"방우(巖)가 일본 순사놈에게 끌려가 감옥에서 맞아 시체가 되어 왔단다. 이런 일이 세상에 어디 있노."
읍내 사람들은 천인공노할 소식에 치를 떨었다. 구수암의 홀어머니와 하나뿐인 여동생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집이 가난하여 초상 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기장의 근대적 여학교인 명정의숙에 다니던 여학생들이 기특하게도 장례를 '면민장'으로 이끌었다. 이들은 십시일반으로 만장기 18개를 만들고 기장 동부리 물방아터 옆에서 노제를 지냈다. 제문은 기장의 한학자인 박란수가 지었고, 명정의숙 출신의 권은해가 읽었다.
'오늘이 무슨 날고. 무궁화 옛 나라에 슬픈 바람이 낯을 치고 수심구름이 눈을 가려 흘러 나니 눈물이라. 만세의 한소리에 만 1년, 감옥 중에 원통히 병을 얻어 본가에 돌아온지 며칠이 못 되어서 거연히 세상을 버린 구(具)공의 상여로다… 슬프다! 나라잃은 설움이여, 우리 겨레 한마음으로 독립을 되찾고자 애국함도 죄가 되나…. 인심이 천심인데 천리가 무심하랴. 때가 오면 원한도 풀릴 날이 있으리라. 슬프다! 구공이여! …오호통제 상향'
이것이 '구수암 만가'다. 내용이 절절해 지금 봐도 눈물이 날 정도다. 3·1운동으로 일제의 경계가 삼엄한 상황에서 어린 여학생들이 나서서 독립운동가의 초상을 치러주었다는 것이 갸륵하다. 구수암은 1992년 건국 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기장의 독립운동사'(기장향토문화연구회)를 쓴 공태도(82) 옹은 "1996년 차성문화제 때 구수암 장례식이 재현된 적 있었는데 반응이 대단했다"면서 "독립운동가만 20여 명을 배출한 기장의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는 의미에서 '구수암 만가'를 문화콘텐츠로 승화시켰으면 한다"고 조언했다.
■ 20세기 투사 권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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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투사 권은해가 필사한 구수암 만가. |
'구수암 장례'를 주도한 권은해(權銀海·1903~1994)는 격동의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관통해온 '우리가 기억하지 못한 20세기 투사'다. 그의 삶은 한편의 영화를 방불케 한다. 젊은 시절엔 항일운동가, 여성운동가로, 한때는 사회주의자로 빨치산이 되려 했고, 늘그막엔 남북 사이에서 경계인으로 살았다.
권은해는 1903년 기장읍 동부리 194번지에서 지주 집안의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기장여자청년회, 양산의 부인회, 근우회 등에서 활동했고, 1930년대 들어 '조선공산당'에 들어가 당시 유행처럼 번지던 사회주의 사상에 눈을 떴다.
해방이 되자 권은해는 항일운동가에서 적극적인 사회주의 여성운동가로 변신한다. 해방 정국에선 박헌영에 동조해 부녀총동맹 위원장이 된다. 1947년 겨울에는 미군의 공출에 반대하다 체포되어 4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그 이듬해인 1948년 7월, 해주의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라는 남로당의 지시가 있자 권은해는 38선을 넘는다. 기장을 떠나며 딸에게 "한달 후에 돌아올 것이니 집 잘 보고 있어라"고 한 약속은 19년이 지나서야 지켜졌다.
그동안 권은해는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고 평양의 간부학교에서 6개월간 교육을 받은 후 고아원 원장, 군 휴양소 간부를 지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온 그는 진주에서 천신만고 끝에 딸을 만났지만 아들이 경찰에 끌려가 살해됐다는 비보를 듣는다. 인천상륙작전 후 북한군이 북쪽으로 퇴각하자 남쪽에서 활동하던 그의 동지들은 지리산으로 들어가 유격투쟁을 전개한다. 그도 함께 하려 했지만 오십에 가까운 여자의 몸이라 거절당했다고 한다. 이후 경상도와 전라도 등지에서 피신생활을 하던 권은해는 1956년 10월 광주에서 체포돼 국가보안법 혐의로 15년형을 선고받았다. 당국의 끈질긴 전향 요구에도 끝내 전향을 거부한 그는 1967년 석방되어 기장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고향에서 그를 반겨주는 사람은 없었다. 지리산 동지들의 원혼 앞에 살아있다는 것이 부끄러워 방에 불도 때지 않았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언젠가 통일이 될 것"이라며 남한과 북한을 똑같이 걱정했다는 그는 1994년 7월 91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삶을 접었다.
■ 아, 김성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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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래고교의
항일운동기념탑. |
부산 동래고교 역사관에는 앳된 독립운동가의 훈장 하나가 보관돼 있다. 이 학교 출신 김성조(金聖祚·1902~1920)에게 2003년 추서된 건국훈장 애족장이다. 부산 북구 구포 태생인 김성조는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해 만세를 부르다 체포돼 감옥에서 잔인한 고문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숨졌다. 열여덟에 어이없이 꺾여버린 청춘이었다.
이웃 사람들과 동료들의 애도 속에 가까스로 장례가 치러져 북구 만덕동 공동묘지에 묻혔으나 후손이 없어 그의 묘는 망실되고 말았다. 무주고혼, 슬프디 슬픈 영혼이 찾은 안식처가 모교의 역사관이다.
묻힐 뻔했던 김성조의 행적은 구한말의 사학자 송상도가 쓴 '기려수필(騎驪隨筆)'에 소개된 사실이 확인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여기에 이런 내용이 있다.
'김성조는 동래고보생이라, 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를 하다 체포되었다. 옥에 있을 때 고문으로 병을 얻어 신음하다가 가출옥 되었다. 병을 치료하였으나 심한 음형(淫刑)을 당한 것이 뿌리 깊이 고질화하여 끝내 사망하였다….'
음형은 고환(불알)에 대꼬챙이로 곶감 끼듯이 찌르는 고문을 말한다. 유관순 열사가 당했다는 것과 비슷한 고문인데, 일제의 잔악한 탄압을 엿보게 한다. 피압박 민족의 울분을 터뜨린 '독립만세'가 그렇게 죽을 죄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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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고 역사관에 있는 김성조의 훈장. |
김성조에게 뒤늦게 추서된 건국훈장 애족장은 원래 국가보훈처에 있었으나 2008년 모교인 동래고 역사관으로 돌아왔다. 동래고 역사관 안대영 관장은 "김성조 선생은 28명의 동래고 출신 애국지사 가운데 마지막으로 공적을 인정받은 분으로, 90여 년만에 모교에 모셔져 안식하게 되었다"면서 "훈장 전수 기념식 때 육군 53사단 군악대가 와서 진혼곡을 연주했는데 분위기가 자못 장렬했다"고 전했다.
동래고 교정에는 항일운동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주먹을 불끈 쥐고 햇불을 치켜든 학생들이 김성조의 화신 같다.
■ 만가를 넘어 희망가로
부산의 독립운동은 의열단, 신간회, 근우회 등 민족·사회운동과 궤를 같이 하며 어느 지역보다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나 총체적인 조명은커녕 기념사업조차 미미하다.
독립운동사에서 빠트릴 수 없는 김두봉, 김약수, 박일형, 박세용 등은 모두 기장 출신이고, 박차정과 그의 오빠인 박문희·문호 형제는 동래를 기반으로 조직적인 항일운동을 펼쳤다. 백산상회를 설립해 임시정부 자금을 지원한 백산 안희제, 의열단원으로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박재혁과 최천택, 역시 의열단에서 활동하며 민족운동을 펼친 문시환과 장건상, 중국에서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항일 독립운동을 펼친 한흥교·한형석 부자,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독립군 자금을 조달한 윤현진, 만주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한 최상훈·변봉금 부부 등은 잊으선 안될 이름들이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옥중에서 순교한 최상림 목사도 기억해야 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한 단채 신채호의 언명은 여전히 유효하다. 조국을 위해 한 몸을 던진 독립운동가들을 기억하는 것은 후손들의 도리이자 의무다. 해서, 오늘 우리가 부르는 만가는 죽은 이를 애도하는 구슬픈 노래가 아니라, 독립정신을 되새기고 평화와 통일을 부르는 희망가여야 한다. 대한독립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