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연금공단 부산지역본부서 식사 만족도·조합 참여여부 설문
- 직원 전원 후원자·조합원 용의
- 날씨 탓에 콩나물 재배 난항
- “고구마 줄기 볶음에 쉰내 나”
- 비빔밥 핵심재료 과감히 포기
- 어르신 “뭐가 문제인지 알았다”
- 젊은 할매 동참 가능성도 확인
- “특허내고 준비 다 하면 올 거야”
사뭇 긴장감이 감돈다. 오늘만큼 반찬 맛에 신경 쓰인 적이 없다. 60여 년 부모 남편 아들딸을 건사하느라 수만 번 차렸던 밥상이다. 꽈리고추찜, 고추된장 무침, 김치, 고구마 줄기 볶음, 콩나물 무침, 무채, 시래깃국. 하나같이 자신 있는 메뉴다. 그런데 반찬 통에 음식을 담아 준비를 마치고도 계속 마음이 불편하다. 결국, 다시 뚜껑을 열어 깨소금으로 풍미를 더한 뒤에야 한시름 놓는다. 정성스레 준비한 반찬을 자동차 트렁크에 차곡차곡 싣는다. 일부 어르신은 마을에 남고 일부 어르신은 ‘생애 마지막 전력질주’ 공동기획팀과 함께 길을 나선다. 남은 어르신들이 길 떠나는 어르신들을 격려한다. “밥 잘 퍼주고 조심해서 댕겨 오소.”
■더 ‘건강해진’ 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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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1일 부산 연제구 연산동 국민연금공단 부산지역본부에서 부산진구 개금3동 10통 전력질주협동조합 어르신들이 국민연금공단 직원들에게 직접 만들어 온 점심을 배식하고 있다. 전민철 기자 jmc@kookje.co.kr |
공동기획팀은 지난 21일 점심시간에 맞춰 부산 부산진구 개금3동 10통 전력질주협동조합원 어르신들과 국민연금공단 부산지역본부를 찾아 협동조합 공식 설립 전 ‘마지막 시식회’를 열었다. 100명가량의 국민연금공단 직원을 대상으로 현장에서 직접 음식을 나눠주고 반응을 듣는 대규모 실전 연습이다.
메뉴는 지난달 쿨 루프(Cool Roof) 사업 자원봉사자들에게 대접했던 무공해 콩나물 비빔밥(본지 지난달 31일 자 9면 보도 ‘시루를 뚫고 나온 희망’)이다. 마을 경로당에서 간단하게 준비했던 지난번과는 다르다. 음식 맛을 냉정하게 평가받기 위해 설문조사도 했다. 식사에 대한 만족도와 전력질주협동조합원 가입 의사 등을 묻는 내용이다. 식사한 직원 중 61명이 설문에 응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날 시식회엔 류승락 본부장 등 국민연금공단 부산지역본부 임직원 대부분이 참석했다. 설문에 참여한 모든 직원은 무공해 콩나물 비빔밥이 “매우 맛있다”고 답했다. 전력질주협동조합에 후원자 또는 소비자 조합원으로 가입하겠냐는 질문에도 전원이 “가입하겠다”고 했다. 일부 직원은 “어르신들의 음식이 정말 맛있다. 매주 월요일을 ‘할매 밥상의 날’로 정하자”고 먼저 제안하기도 했다.
전력질주협동조합 구성과 운영 방식의 청사진을 그리기에 충분한 하루였다. 협동조합이 훨씬 건강해졌다.
■위기는 극복해내는 게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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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사를 마친 국민연금공단 부산지역본부 직원들이 음식 맛과 조합원 가입 여부 등을 묻는 설문조사에 참여하고 있다. |
이번 시식회의 더 큰 성과는 ‘막바지 담금질’을 통해 개금3동 마을에 또 한 번 긍정적 변화가 일어났다는 점이다. 어르신들은 잇따른 위기에도 포기하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실수를 거듭할수록 성공을 향한 디딤돌을 더 높게 쌓았다.
시식회를 앞두고 예상치 못한 변수가 있었다. 앞서 콩나물을 여러 차례 시범 재배할 때보다 제법 날이 선선해졌다. 시범 재배 땐 콩나물이 너무 빨리 자라 걱정했다면, 이번엔 콩나물이 잘 자라지 않는 게 문제였다.
‘콩나물 장인’ 이수금(85) 할머니와 황옥희(80) 할머니, 그리고 지난 시범 재배 때 10통에서 홀로 실패를 경험한 황원선(80) 할머니까지 3명이 시식회 때 쓸 콩나물을 키웠다.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황옥희 할머니는 “임 씨 할매(5년 전 사별한 이수금 할머니 남편의 성씨다)만 잘했다. 내가 키운 건 잘 키웠다 싶었는데, 시루 밑 부분 콩나물이 엉망이다. 여기(황원선 할머니) 거는 아예 망했다. 콩나물을 한 봉지씩 국민연금공단 직원들한테 선물하려고 했는데 실패했네”라며 아쉬워했다.
황원선 할머니의 표정도 어두웠다. 사실 황 할머니는 한 번의 실패를 만회하려고 이번엔 콩나물을 키우는 데 엄청난 공을 들였다. 날이 선선해서 콩나물이 잘 안 자라나 싶어 시루를 가죽점퍼로 덮어도 봤다. 또 빛이 부족한가 싶어서 이웃집 옥상에다 시루를 올려놓기도 했지만,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양반(이수금 할머니)까지 실패했으면 큰일 날 뻔했어. 시루 밑에 받쳐 놓은 대야 물이 맑아야 하는데 내 거는 콩나물이 썩어서 물이 뻑뻑하더라고.”
‘불행’은 시식회가 시작된 직후에도 겹쳤다. 반찬 중 어르신들이 제일 정성을 들인 게 고구마 줄기 볶음이다. 모두 둘러앉아 껍질을 벗기는 데만 종일 걸렸다. 고구마 줄기 볶음은 콩나물 비빔밥의 맛을 더해주는 핵심 재료다. 한데 국민연금공단 직원 중 ‘첫 손님’이 조심스럽게 어르신들에게 “고구마 줄기 볶음에 쉰내가 나는 것 같다”고 알렸다.
식사시간을 맞추려 전날 오후에 미리 볶은 게 화근이다. 황옥희 할머니는 “세상에, 비빔밥 재료 중에 맛이 제일 좋은 건데… 오늘 새벽에 볶았으면 좋았을걸”이라며 안타까워했다. 고구마 줄기 볶음 맛엔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어르신들은 만약의 사고 위험을 막기 위해 과감하게 고구마 줄기를 빼고 콩나물 비빔밥을 만들기로 했다.
시식회 전후 모든 정황이 어르신들을 상심에 빠뜨릴 만했다. 그러나 어르신들은 이제 실수를 극복하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안다. 좌절하기보다 실전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대처할지를 논의했다. “아이고, 오늘 여기(시식회) 안 왔으면 뭐가 문제인지 모를 뻔했네. 협동조합 만들려면 음식 안 상하게 먼저 커다란 냉장고부터 사야겠다. 콩나물도 그렇고, 다음 실전에선 이런 실수 절대 안 해.”
■확대되는 ‘협동’의 의미
협동조합 설립에 다소 부정적이던 60대, 70대 초반 어르신들의 참여도 이어질 예정이다. 전력질주협동조합의 지속 가능성이 확인된 것이다. 시식회 때 큰 역할을 한 박영수(84) 할머니는 마을 ‘새댁’들(어르신들은 60, 70대 할머니들을 새댁이라고 부른다)을 협동조합 활동에 참여시키는 계획을 스스로 진행 중이다.
박 할머니는 “60, 70대 젊은 동생들에게 이번 시식회 때 시래깃국 좀 끓여 보라고 했다. 남은 시간이 빠듯해서 성사되진 못했지만, 동생들 여러 명이 협동조합에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며 “협동조합을 든든히 받쳐줄 젊은 조합원이 필요하다. 우리 80대 형님들이 먼저 끌고 가면, 동생들이 앞으로의 협동조합을 책임질 것”이라고 했다.
개금3동 10통에는 건강하고 왕성하게 활동하는 60, 70대 어르신들이 꽤 거주한다. 전력질주협동조합 1호 조합원 어르신들보다 10살가량 젊다. 비교적 젊은 60, 70대 어르신들은 사실 그동안 협동조합에 의구심을 가져왔다. 하지만 이제 이들 ‘새댁’까지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전력질주협동조합은 한 걸음 더 나아간 꿈을 꿀 수 있게 됐다.
박 할머니는 “준비 다 하고 특허(사업자 등록)도 내면 지금보다 마을 분위기가 훨씬 좋아질 거다. 내가 젊은 할매들 협동조합에 팍팍 밀어 넣을게. 이미 여러 명 확보했다”고 자신했다.
권혁범 김영록 기자 kiyuro@kookje.co.kr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취재했습니다.
▷공동 기획=사회복지연대, 복지법인 우리마을, 국민연금공단 부산지역본부, 녹색도시부산21추진협의회 ▷후원=개금3동주민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