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내가 죽은 뒤 장님이 된 남자
- 갑자기 사라진 남편을 찾는 여자
- 우연히 같은 카페에서 마주친다
- 죽은 아내와 목소리가 닮은 그녀
- 사라진 남편과 닮은 그의 외모에
- 둘은 놀라워하며 합석하게 되고
- 마침 들어온 그의 딸·그녀의 아들도
- 얼마 전 헤어졌던 연인 사이였으니
- 운명처럼 만난 그들 카페를 나선다
★등장인물 : 김상민(35세) 박혜영(33세) 박상호(58세) 한지숙(55세) 사내(30세)
★때와 곳 : 요즈음, 만추의 해질녘, 부산 전포 카페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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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부산진구 전포동 일대는 원래 철물, 산업용 자재 등을 파는 공구상가 거리였으나 2010년 이후 많은 수의 아기자기한 카페들이 들어서면서 이색적인 카페거리로 변모했다. 사진은 전포 카페거리의 한 골목. 국제신문DB |
-전포동 카페거리의 몇몇 장소. 카페가 주 무대이지만 탁자와 테이블 위치 이동을 통해 여러 곳으로 바뀐다. 어둠 속에서 두런거리는 행인들의 소리와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가 가까워지다가 사라진다. 로드리고의 ‘아란훼즈 기타 협주곡’의 2악장 끝부분이 울려 퍼지면서 무대 밝아지면 중년의 사내가 눈을 깜박이며 음미하듯 듣는다.-
종업원 : 선생님이 이 카페에 처음 들렸을 때였죠 아마. 밑도 끝도 없이 테이프를 내밀며 그 소절을 들려 달라고 할 때부터 무슨 깊은 사연이 있는 줄 알았어요.
박상호 : (잠시 머뭇거리다가) 사랑을 잃고 난 뒤부터였지. 죽은 아내가 즐겨 듣던 곡이었지.
종업원 : 아내분께서 음악을 좋아하셨나 봐요.
박상호 : 돈은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버팀목이라고 주장할 때마다 아낸 날 보고 두 눈 시퍼렇게 뜨고도 앞을 못 보는 불쌍한 사람이라 비웃었지.
종업원 : 그런데 아내분께선 어떻게?
박상호 : 췌장암 말기로 홀연히 사라져 버렸어.
-박상호가 눈을 깜박이다 슬쩍 눈시울을 훔친다. (사이) 종업원이 황망한 표정으로 박상호를 바라보고 있다.-
박상호 : 아내 말처럼 난 눈뜬장님이었지. 사랑을 잃은 죄로 어느 날 갑자기 눈을 뜨고도 앞을 못 보는 청맹과니가 돼 버린 거야. (사이) 그런데 말이야. 정말 신기한 건 눈을 뜨고 있을 땐 앞을 못 보는 장님이었지만, 막상 눈을 잃고 나니 눈앞이 더 환해지는 거야.
종업원 : 사랑을 잃고 나서 더 귀한 사랑을 깨달은 것이겠지요.
박상호 : 그래, 맞아! 그때 내가 지금 젊은이 같은 생각을 가졌더라면….
종업원 : (중년 여자 손님이 들어오는 것을 확인하고) 어서 오십시오.
한지숙 : (자리에 앉으며) 저, 여기가 그 유명한 전포 카페거리 맞나요?
종업원 : (물컵을 내려놓으며) 네, 맞습니다. (박상호를 바라보다) 누구든지 여길 오면 사랑을 하게 된답니다.
한지숙 : 어머, 정말 그래요? (사이) 참, 음악 한 곡 부탁해도 될까요? 로드리고의 ‘아란훼즈 기타 협주곡’ 있습니까?
종업원 : 네? (박상호를 가리키며) 저 손님께서 맡겨놓은 테이프라 허락이 필요할 것 같네요.
한지숙 : 음악은 만국 공통어 아닌가? 꼭 누구한테 허락을 받고 들어야 할 필요까지 있나요?
-박상호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선다. 지팡이를 더듬거리며 한지숙의 테이블 가까이 걸어온다. (사이) 한지숙이 그를 올려다보다 일순 깜짝 놀란다.-
박상호 : 죽은 제 아내 목소리를 많이 닮았군요.
한지숙 : (박상호의 외모를 찬찬히 살피다가) 그건 피차일반인 것 같네요. 저도 처음엔 날 떠난 그이가 다시 돌아와 내 앞에 서 있는 걸로 착각할 정도였으니까요. (사이) 혼자시면 함께 커피라도 마시며 얘길 나눌까요?
박상호 : 저야 과분한 영광이죠.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한지숙 : 제 목소리가 부인과 그렇게 닮았나요?
박상호 : 제 외모가 바깥양반과 그렇게 닮았습니까?
-두사람 서로를 바라보며 한동안 조용하게 웃는다.-
박상호 : 참, 아까 바깥양반이 떠나셨다고 하던데, 어디 먼 곳엘 갔나요?
한지숙 : 아뇨. 그냥 느닷없이 아무 말도 없이 떠나 버렸어요. 벌써 2년 됐어요. 이젠 찾는 데도 지쳤어요.
박상호 : 크게 싸웠나요?
한지숙 : 직장 간다고 아침에 집을 나간 사람이 글쎄 2년째 안 돌아오고 있답니다. (사이) 도대체 왜 내게서 떠났는지 그 이유라도 알면 좋겠어요.
박상호 : 세상엔 불가사의한 일이 많을 테니까요. (사이) 그날 출근할 땐 아무런 낌새도 없었나요?
한지숙 : 조금 우울해 보였을 뿐인걸요.
-핑크 플로이드의 ‘샤인 온 유 크레이지 다이아몬드’의 엘렉트릭 기타 연주가 들려온다.-
한지숙 : (음악을 듣자마자) 아니, 이 음악은 우리 아들이 좋아하는 노랜데?
박상호 : 그래요? 우연치곤 신기하네요.
한지숙 :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떠난 여자와 평소 즐겨 듣던 노래라고 하던데… 여기서 다시 들으니 새삼스럽네요.
박상호 : 그건 그렇고 바깥양반이 왜 사라진 걸까요?
한지숙 : 그인 좀 쉬고 싶은 모양이었는데, 난 그것도 모른 채 그일 돈 버는 기계로 몰아붙이고 있었나 봐요.
-핑크 플로이드의 ‘샤인 온 유 크레이지 다이아몬드’의 엘렉트릭 기타 연주가 다시 가까워져 오자 한지숙이 잠시 눈을 감으며 한숨을 내쉰다.-
한지숙 : 그이의 사랑을 잃고 나니 비로소 그 사람의 사랑이 새삼 느껴졌어요. (사이) 곁에 있을 때 왜 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고 함께하지 못했나 생각하니, 그런 내가 죽도록 미웠어요.
박상호 : 기다려 보세요. 이곳 카페거리에 오면 사랑이 보인다 하잖습니까?
한지숙 : 사랑이 보인다고요?
박상호 : 믿으면 보이고 보이면 찾을 수 있을 테니까요.
한지숙 : 선생님께서도 사연이 참 많아 보여요.
박상호 : 딸 하나 있는데. 그런데 도대체 결혼할 생각을 하지 않아 걱정입니다. 여기서 공구상을 크게 벌이다가 부도가 나는 바람에 집안이 풍비박산 났어요. 그 바람에 그 아이도 그만 스스로 사랑하던 남자를 떠나보내고 크게 상심했었나 봐요.
한지숙 : 그래요? 정말 안 됐군요. 나도 아들 하나뿐인데 어느 날 사랑하던 여자가 아무 말 없이 사라져 버렸나 봐요. 지금도 그 여자를 찾아 헤매고 있는가 봐요.(사이) 어미인 난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고, 아들은 떠난 여인을 기다리고… 참 우습죠?
박상호 : 그러고 거기나 저, 모두 사랑을 잃은 사람들뿐이네요.
한지숙 : 세상엔 불가사의한 일들이 많으니까요.
-음악이 거의 끝나갈 무렵, 김상민이 후줄근한 차림으로 카페로 들어선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종업원에게 “그 음악 다시 한번 틀어주세요”하고 소리친다. (사이) 한지숙이 갑자기 벌떡 일어서서 그 청년을 바라본다. 청년도 한지숙을 바라보고 어이없는 표정을 한다.-
한지숙 : 아니, 상민아. 네가 여긴 웬일이냐?
김상민 : 어머닌 여기 웬일이세요?
한지숙 : 이리 와 여기 앉아. (김상민 테이블 곁으로 다가오자 박상호를 향해)아까 얘기하던 우리 아들이에요. (상민을 보고) 인사 드려라.
김상민 : (엉거주춤 자리에 앉으며) 안녕하세요, 김상민입니다.
박상호 : 방금 어머니로부터 사랑하던 여자가 아무 말 없이 사라졌다는 안타까운 사연 듣고 있던 참이었어요.
김상민 : 왜 말없이 떠났는지 그 이유라도 알았으면 좋겠어요.
빅상호 : 아버지도 그러셨다면서요? 세상엔 우리가 해결하지 못할 불가사의한 일이 많으니까요.
김상민 : 더욱더 불가사의한 건 그 여자와 하루가 멀다 하고 이곳 카페거리를 찾았는데, 떠난 뒤로는 이곳에 얼씬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한지숙 : 이곳을 찾으면 네가 더 생각날 거니까 그러겠지.
박상호 : 우리 딸아이도 그러더군요. 그렇게 자주 찾던 이곳 카페거리를 왜 찾지 않느냐 물었더니, 여기만 오면 그 사람 생각이 더 난다나요. 이 거리 곳곳에 사랑의 흔적이 묻어 있을 테니까요. 그런 상처가 덧나죠.
한지숙 : 선생님, 그런데도 우린 왜 이곳을 떠나지 않은 채 떠돌죠?
박상호 : 곳곳에 묻어 있는 사랑의 냄새를 맡으면 아름다운 추억이 새록새록 일어날 테니까요. ( 두 사람을 향해) 반드시 돌아올 겁니다. 전 사랑을 믿으니까요.
한지숙 : 네, 그래요, 저 또한 사랑을 믿고 싶어요.
박상호 :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사이) 사랑이 그 전보다 더 새로워지고 굳어질 테니까요.
한지숙 : 이 카페거리가 그렇다지 않습니까. 이곳에 오면 안 보이던 사랑도 보이고, 잃었던 사랑도 되찾을 수 있겠죠.
김상민 : 저도 그 말을 믿겠습니다.
박상호 : 난 육체의 시력을 잃고서야 마음의 눈을 떴으니까.
김상민 : (두 사람의 손을 잡으며) 그러니까 앞으로 우리, 힘 내자구요.(모두 맞잡은 손을 치켜 올리며 사랑을 위하여 파이팅!)
-세 사람이 파안대소하고 있는데, 카페의 문이 열리며 박혜영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들어서서 주위를 살피기 시작한다. (사이) 박혜영을 발견한 김상민이 깜짝 놀란다.-
김상민 : 혜영아!
박상호 :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혜영이라면 우리 딸인데… 아니, 두 사람 서로 아는 사이였어?
김상민 : 제가 사랑하던 여잡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여자예요.
한지숙 : 아니, 그렇다면 저 아이가 선생님의 딸이에요? (사이) 세상에 백주대낮에 어찌 이런 일이…?
박혜영 : 아빠, 상민 씨!
-박혜영이 다시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김상민이 부리나케 달려가 박혜영을 뒤에서 와락 껴안는다. (사이) 박혜영이 다시 돌아서서 훌쩍인다.-
김상민 : 그래, 왜 날 떠났던 거야?
박혜영 : 집안이 풍비박산 났는데 나라도 정신 차리지 않으면, 우리 집안이 금세 무너질 것 같았단 말이야.
박상호 : 옛사랑의 그림자가 눈에 밟혀 여길 찾은 것이구나.
한지숙 : (박혜영을 끌어안아 다독이며) 그래, 잘 왔다. 네 사랑도 살리고, 우리 상민이 사랑도 살리고… 그러면 된 거잖아, 응?
박혜영 : 상민아, 정말 미안해. 내 일만 생각하고 네 아픔은 생각 못 했어.
한지숙 : 그럼 된 거지 뭐.
박상호 : 우리, 여기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두 젊은이의 기적적인 해후를 위해 술잔이라도 기울여야죠.
한지숙 : 네, 그래요. 오늘 술은 제가 사도록 할게요.
박상호 : 아닙니다. 떠난 아버지가 다시 돌아올 수 있길 기원하는 의미에서 제가 사는 게 당연하죠.
한지숙 : 남편을 찾겠다는 제 꿈은 어느 정도 이루어진 것 같아요.
김상민 : 엄마, 아니 왜요?
한지숙 : (박상호를 찬찬히 살피며) 네 아버지를 꼭 닮은 선생님을 만났잖니?
김상민 : 아니, 그러고 보니 우리 아버지를 참 많이 닮으셨네요.
박상호 : 제 꿈도 어느 정도 이루어진 것 같네요.
한지숙 : 왜요? 돌아가신 부인께서 환생이라도 하셨나요?
박상호 : (한지숙을 찬찬히 보며) 우리 아내의 목소리를 빼닮은 여기 한 여사님을 만났잖습니까?
종업원 : (그들 쪽으로 걸어와) 제가 그랬잖아요. 이곳에 오면 사랑이 있다고 했잖습니까? (꾸벅 인사하며). 좋은 밤 되십시오. (모두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는다)
-그들이 카페 문을 열고 나간다. (사이) 종업원이 텔레비전 리모컨 스위치를 누르자 마침 뉴스가 방송되고 있다.-
소리 : (아나운스먼트) 다음은 부산지역 뉴스입니다. 오늘 아침 7시경 시내 전포동 카페거리의 한 골목에서 50대 노숙자 한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곳을 청소하던 환경미화원이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이 남자는 119 구급 차량에 의해 인근 병원 응급실로 실려가 치료를 받고 있으나 생명에는 큰 지장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신원을 확인한 결과 이 남자는 2년 전에 탄탄한 중소기업의 이사 승진을 앞두고 갑자기 가족에게 아무런 연락도 없이 사라져 실종 신고가 된 상태입니다. 앞길이 창창하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진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대 잠시 어두워졌다가 밝아지면 무대는 전포동 카페거리로 되어 있다. 지금까지 출연한 인물들이 모두 등장해 거리를 걸어가고 있다. (사이) 그들은 한동안 반복해 거리를 지나다니는 마임을 하다가 어느 순간 무대 곳곳에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스톱 모션으로 서 있다.-
행인1(여자) : 얘, 서면 전포 카페거리 있잖아? 그곳에 가면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도 금세 이루어진대.
행인2(여자) : 그것뿐인 줄 아니? 떠난 사랑도 다시 돌아온다잖아.
행인3(남자) : 야, 카페거리에 가면 곳곳에 사랑이 보인다며? 우리 그곳에 한 번 안 가 볼래?
행인4(남자) : 야, 그것뿐인 줄 아니? 식었던 사랑도 다시 불타오른대.
행인1(여자) : 어머, 그러고 보니 마법의 성이네.
-무대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 스포트라이트가 비친다. (사이) 핑크 플로이드의 ‘샤인 온 유 크레이지 다이아몬드’가 엘렉트릭 기타로 연주되는 가운데 무대 서서히 막.-
김문홍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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