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난 독자 지역 언론사에 돌 투척
“데모 난 거 압니까. 왜 취재 안 합니까. 30년 독자인데 신문 끊겠습니다.” “당신들은 대한민국 사람 아닙니까.”(‘부마항쟁과 한국언론’ 논문-차성환-2011년)
1979년 10월 16일 오후부터 국제신문을 비롯한 부산 언론사에 전화가 빗발쳤다. 돌멩이 세례를 받은 곳도 있다. 15일 부산대 민주선언문이 뿌려졌고, 16일 부산 전역에서 대규모 민중 항거가 벌어졌으나 17일 자 발행 신문에서도 관련 소식을 보도한 언론은 없었다.
국제신문도 이틀 뒤인 18일 자에야 ‘부산에 비상계엄 선포’라는 1면 머릿기사(사진)로 소식을 다뤘다. 항거를 일으킨 부산시민 입장이 아닌 정부를 대변했다. 박정희 대통령 담화와 계엄 포고문 등 정부 발표 내용이 그대로 인용됐다. ‘16일 소란으로 학생 2~3명, 경찰관 50명이 다쳤다’는 구자춘 내무장관의 발표를 검증 없이 받아썼다.
언론이 소극적이었던 것은 1975년 4월 선포된 긴급조치 9호 때문이었다. 유언비어 날조와 유포, 유신헌법의 부정과 왜곡 등의 보도는 일체 금지하며,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하도록 규정됐다. 1979년 8월 신민당사에서 농성 중인 YH무역 여공 강제진압을 취재한 기자 15명이 당한 무차별 폭행의 학습효과는 기자들을 더욱 위축시켰다.
당시 국제신문 기자였던 조갑제 씨가 쓴 저서 ‘유고’(1987년-한길사)에 따르면, “16일 현장에 있던 기자들은 이 큰 사건을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알려야 한다고 조바심 나 있었으나 17일 오전 편집국 회의 때 보도 문제를 심각하게 거론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 씨는 “모두 자학하면서, 스스로 포기하고 비웃으며 경천동지 대사건을 애써 모른척했다”고 평가했다.
김화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