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서 파병 2311명 영웅 영면
- 전세계 유일한 유엔군 합동묘역
- 1951년 첫 조성 땐 미군이 관리
- 20여 년의 기록은 안 남은 상태
- 당시 유일 한국 직원 정태홍 씨
- “사망기록 넣은 유리병 함께 묻어”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의 상흔은 남북한에만 그치지 않았다. 국경을 넘어 피를 나눈 유엔군은 먼 나라에서 평화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유족은 지금도 각국에서 전쟁의 참혹함을 상기하고 아픔을 공유한다. 이 슬프고도 영광스러운 전쟁 역사를 다 함께 추모하는 곳이 부산에 있다. 바로 세계 유일의 유엔군 합동묘역인 유엔기념공원이다. 5일 준공 70주년을 맞는 기념공원은 이곳에 영원히 잠든 2311명(사후 안장 포함)의 영웅과 함께 평화와 희망의 새 역사를 기록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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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1년 조성 10년을 맞아 찍은 옛 유엔기념공원 전경(왼쪽 사진)과 오늘날 모습. 재한유엔기념공원 관리처 제공 |
■11개국 2311명의 영웅 영면
기념공원은 1951년 1월 18일 유엔군 전사자 매장을 위해 유엔군사령부가 조성했다. 3개월 뒤인 4월 5일 묘지가 완공되면서 개성과 인천, 밀양 등지에 가매장돼 있던 유엔군 전몰장병의 유해가 지금의 자리에 묻히게 됐다. 현재 한국(37명)을 비롯해 영국(886명)과 터키(462명), 캐나다(380명) 등 11개국의 유엔군이 안장돼 있다. 미군은 전쟁 당시 가장 많이 전사했지만 3만6492구의 유해 모두 본국으로 이장됐으며, 휴전 후 한국에 주둔해 있던 미군 중 여기 안장되기를 희망한 40명만이 현재 이곳에 잠들어 있다.
기념공원 관리는 11개국으로 구성된 유엔기념공원국제관리위원회(Commission for the UNMCK)가 맡고 있다. 1955년 12월 유엔총회에서 유엔이 영구 관리하기로 결의한 뒤 1974년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UNCURK)가 관리해오다 지금의 상태가 됐다.
국제관리위원회는 1년에 한 번 각국 대사가 만나 정기회의를 통해 안건을 결정한다. 기념공원의 인지도를 높이고 정체성을 홍보하는 것부터 세계 평화의 중요성 등 유엔기념공원의 역할과 의미에 대한 부분을 소통하며 결정해가고 있다.
■기념공원 역사의 산증인 정태홍 씨
한국이 기념공원 관리국에 포함된 것은 1974년이다. 1951년 조성 때부터 미국과 유엔이 관리해와 이곳이 어떻게 조성됐고 어떤 업무를 맡아왔는지 뚜렷이 알려진 바 없다. 한국이 관리하기 이전 20여 년간의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국제신문 취재진은 이 ‘기록의 암흑기’를 밝혀줄 증인과 어렵게 연락이 닿았다. 주인공은 1954년부터 1992년까지 유엔기념공원에서 근무한 정태홍(91) 씨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미8군 소속으로 통·번역을 맡아 유엔묘지(현 유엔기념공원)로 배속됐다.
정 씨는 유엔기념공원이 조성된 초기부터 이곳을 지킨 유일한 한국인 직원이었다. 그는 “통역자도 저 혼자인 상태에서 인부를 관리하고 시체가 들어오면 서류를 정리해서 유엔으로 보냈다. 각국 대사를 만날 땐 한국에 연락하는 일까지 도맡았다”며 “유엔기념공원의 역사를 가장 잘 아는 한국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약 70년 전의 일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특히 유엔군과 북한군의 유해를 교환하던 순간은 또렷이 생각난다고 강조했다. 정 씨는 “유엔묘지 주변 산 너머에 가매장된 북한군 시체가 가득했다”며 “삽으로 한 구씩 파서 두꺼운 배낭에 넣은 뒤 화물열차로 판문점에 보낼 땐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고 회상했다. 이어 그는 “판문점에서 북한군 유해와 맞바꾼 유엔군 유해는 유엔묘지에 모시고 와 매장했다”면서 “이때 사망 경위와 시신 상태 등이 적힌 기록지를 유리병에 넣어 유해 옆에 함께 묻었다”고 말했다.
그는 유엔기념공원의 중요성을 다시금 강조했다. 정 씨는 “수만 명의 유엔군이 오로지 한국을 위해 싸우다 타국에서 사망했다. 그 희생은 무엇보다 값진 것”이라며 “왜 이들이 우리나라에서 목숨을 바쳐야 했는지 늘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준영 기자 ljy@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