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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둔 얘기를 터놓는 '인생현상소' <8> 박희진의 ‘사진’

“사진 한 장 못 찍어드린 할매 생각에…26년째 영정사진 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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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업어키운 손자가 사진가인데도
- 할머니 황망하게 돌아가실 때
- 장례식에 쓸 사진 없어 恨으로

- 복지관서 영정사진 무료 촬영
- 2만5000명 어르신 렌즈에 담아
- “손자 대하듯 사탕 건네는 분들
- 사진 보고 고마워하시면 뿌듯”

2만5000여 장. 사진가 박희진(56) 동주대 사회복지과 교수가 지난 26년간 찍은 영정사진이다. “1991년 할머니가 교통사고로 사망을 하셨는데 영정사진이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주민등록증 사진을 확대해 썼어요. 그때 ‘생활이 어려운 어르신들 영정사진을 찍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제 머리가 희끗해진 박 교수는 30년 전 돌아가신 할머니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할매. 늘 보고픈 우리 할매. 잘 키워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도 못 드리고 보냈습니다. 할매, 사랑합니다.”

박희진 교수가 어르신을 보며 영정사진 촬영 준비를 하고 있다. 박희진 교수 제공
경북 군위에서 태어난 박 교수는 대가족의 품에서 자랐다. 할머니·부모님과 4남매까지. 막내였던 그는 할머니 사랑을 듬뿍 받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대구로 전학가기 전까지 한 번도 걸어서 등교한 적이 없어요. 할머니가 매일 아침 나를 업고 데려다 주셨거든. 그만큼 특별 대우를 받았어요.”

박 교수는 중앙대 사진학과 조교이던 1991년 10월 29일을 잊지 못한다. “금요일인 그날이 제 생일이었어요. 친구들이 마련한 축하모임에 가다가 가벼운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어른들이 걱정할 것 같아 집에는 알리지 않고. 월요일에 출근했더니 사무실에 ‘교통사고’라는 메모가 붙어 있었어요. 집에 전화했더니 할머니도 저와 비슷한 시간에 교통사고를 당해 위중하다는 겁니다. 골목에서 후진하는 덤프트럭에 치여서.”

손자가 고향집에 도착한 이튿날 새벽 할머니는 사망했다. “너무 황망하게 돌아가셔서 장례식에 쓸 사진이 없었습니다. 남은 거라곤 주민등록증 사진이 전부. 요즘은 주민등록증이 신용카드 형태로 나오지만 그때만 해도 종이를 코팅해 썼던 시절이라 오래되면 빛이 바래 알아보기조차 힘들었죠. 그래도 어쩝니까. 주민등록증 사진을 카메라로 찍어 사용할 수밖에. 그렇게 아끼던 손자가 사진을 전공했는데도 할머니 사진 한 장 찍지 않았다니, 한심했죠. 할머니처럼 영정사진을 미처 찍지 못한 어르신을 위해 봉사하자고 다짐했습니다.”

1996년 동주대에 임용된 박 교수는 바로 촬영을 시작했다. “월급이 매달 들어오니까 비용 걱정은 덜었어요. 무작정 복지관을 찾아가 영정사진을 찍었습니다.” 박 교수의 영정사진 촬영 기준은 ‘생활이 힘든 70세 이상’. “동네 사진관을 가면 영정사진 인화까지 5만 원이 넘는 금액이 들어요. 당장 오늘 먹고 살기도 힘든 분들한테는 부담이 됩니다. 잘 사는 집은 미리 오동나무 관이나 수의까지 마련해두잖아요.”

군위에서 함께 살았던 박희진(왼쪽) 교수와 할머니(가운데)의 가족사진. 박희진 교수 제공
박 교수가 처음 영정사진을 찍을 때는 ‘약장수’ 아니냐는 오해도 받았다. “사진을 인화해 액자에 넣어 배달까지 하는 비용이 무료라고 했더니 ‘뒤에 건강식품 팔려고 하는 게 아니냐’ ‘무료라고 해놓고 바가지 씌우려 하느냐’는 수군거림이 들렸어요. 신뢰가 쌓이는 데까지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영정사진이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고 거부하는 분도 계세요. 그럴 때마다 ‘사진이 잘 나오면 오히려 장수하신다’고 설득합니다. 요즘은 복지관이나 주민센터에서 꾸준히 연락이 와요.”

봉사활동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사진 배달이 가장 힘들어요. 하루 촬영 나가면 100명에서 300명까지 찍습니다. 인화해 액자에 넣은 사진을 차 트렁크와 옆자리·뒷자리에 싣고 촬영했던 장소로 다시 가요. 목 빠지게 기다리실 어르신들 생각하면 마음이 급해집니다.”

어떤 사진이 가장 기억에 남을까. “한 번은 아주 낡은 진주 목걸이를 한 할머니가 오셨어요. 목걸이를 빼자고 했더니 절대 안 된대요. 사회복지사가 ‘아들이 몇 해전 사망했는데 치매에 걸린 할머니는 모르신다. 목걸이는 아들이 칠순 잔치 때 해준 선물’이라고 전해주더군요. 몇 해 전 만난 70대 어르신은 50대 중증 장애인 딸의 사진은 찍게 하면서 자신은 거절하셨어요. 딸보다 오래 살아야 한다면서.”

1년에 한두 번은 복지관에 ‘영정사진을 빨리 줄 수 없느냐’는 전화가 올 때도 가슴이 시리다. 어르신이 돌아가셨다는 뜻이기 때문. 사진 찍을 때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입을 꽉 다문다. 박 교수는 ‘있는 그대로’ 렌즈에 담으려 한다. “봉사활동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웃는 모습만 찍었어요. 그런데 아무리 재롱을 피워도 웃지 않는 분들이 계십니다. 고단한 삶 때문에 웃음이 어색해진 겁니다. 얼굴에 담긴 그 분들의 인생을 ‘억지 웃음’으로 왜곡하고 싶지는 않아요.”

요즘 만나는 할머니들은 박 교수를 손자 대하듯 한다. 주머니에 넣어둔 사탕이나 귤, 때로는 꼬깃꼬깃 접은 천 원짜리 몇 장을 건네기도 한다. “무뚝뚝한 할아버지들과 달리 할머니들은 촬영 전 서로 립스틱을 발라주며 외모를 깔끔하게 정돈하세요. ‘주름 좀 지워주면 안되겠냐’고 부탁도 합니다. 사진 보고 고마워하시는 어르신들을 볼 때면 뿌듯함을 느낍니다. ‘내가 좋은 일 하고 있는 거 맞지?’라고 되묻기도 하고.”

박 교수는 아버지 영정사진은 찍지 못했다. “뇌경색으로 갑자기 입원하시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쳤습니다. 지인들에게는 ‘부모가 건강하실 때 미리 찍어두라’고 조언합니다. 요즘 80대는 청소년기에 해방을 맞아 한국전쟁을 겪고 근대화에 앞장선 분들입니다. 그 덕에 우리는 온수 나오는 집에서 편하고 살고 있잖아요. 영정사진 촬영은 그 들의 삶에 대한 제 나름대로의 존중이자 예의입니다.”

박 교수는 지난해 마음 고생을 많이 했다. 코로나19로 촬영 약속을 모두 취소해야 했기 때문. “노인 복지시설이 전부 문을 닫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겨울방학은 바쁘게 뛰어다니려고 합니다. 단계적 일상회복이 되면 1년간 미뤄뒀던 촬영을 모두 소화하려 합니다. 70, 80살이 넘어도 영정사진 촬영은 계속 하고 싶어요. 할머니와의 약속을 지켜야 하니까요.”

정채영PD codud3597@kookje.co.kr

※함께 제작된 동영상 인터뷰는 유튜브 ‘국제신문’ 채널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제작지원 : 기장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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