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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최동원 <3> 야구선수 최동원

‘난쟁이 시대’ 희망을 던진 거인 … 기록이 아닌 기억으로 남다

  • 정범준 ‘거인의 추억’ 저자
  •  |   입력 : 2022-01-11 19:06:53
  •  |   본지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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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확실성 가득한 암울한 시대
- 롯데 우승 이끌며 큰 감동 선사
- 국가대표로도 깊은 인상 남겨

- “최동원은 MLB서도 통할거야”
- ‘야구선수’가 가장 어울린 전설
- 부산 시민에 강렬한 추억 선사

‘거인의 추억’(실크캐슬 펴냄·2008년)을 출간하며 나는 ‘야구선수 최동원 평전’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야구인’ 또는 ‘투수’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은 데에는 명백한 의도가 있었다. ‘야구인 최동원’으로는 불꽃 같은 그의 야구 인생을 표현하기에 뭔가 한가한 느낌이었다. 투수 최동원? 투수 앞에 ‘불멸의’ ‘전설의’ ‘철완’ ‘무쇠팔’ 같은 온갖 수식어를 붙인다고 해도 왠지 공허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야구선수 최동원’, 이렇게 써야 비로소 최동원의 오기와 자존심, 희생과 투혼이 연상되면서 나의 가슴 속에 불꽃이 일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고(故) 최동원 선수를 기리는 동상은 부산 사직야구장을 바라본다. 그는 생애 마지막 순간에도 유니폼을 입고 싶어 했다. 역시 최동원이었다. 여주연 기자 yeon@kookje.co.kr
그래서 나는 ‘야구선수 최동원 평전’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쓰기로 했다. 흔히 야구를 기록의 스포츠라고 하지만 아무래도 기록보다는 기억 또는 추억에 무게를 둔 글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연감(年鑑) 속 기록이 야구선수의 전부가 아니라고 믿었던 까닭이다.

예를 들어 ‘해결사’ 한대화, ‘그라운드의 여우’ 김재박의 프로야구 통산 타율은 각각 0.279, 0.273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한대화와 김재박이 같은 포지션의 김동주와 이종범보다 레벨이 낮은 선수였다고 말할 수 없다. ‘거인의 추억’에 “기록은 연감에 남지만 인상은 가슴에 남는다”고 쓴 것은 이 때문이며, 전문 야구인도 아닌 내가 ‘야구선수 최동원’에 대한 글을 쓸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 아기 장수

2018년 9월 14일 최동원 7주기 추모행사에 고인의 모친 김정자(왼쪽) 여사와 이대호 선수가 인사하고 있다. 국제신문 DB
그의 직구 평균 구속과 회전수, 커브의 낙차, 제구력, 볼 배합 등 이른바 ‘스탯(stat)’을 면밀히 분석한다 해도 ‘야구선수 최동원’의 진가가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야구선수가 ‘전설’로 남기 위해서는 깊은 인상과 미칠 듯한 감동, 온몸을 관통하는 엑스터시, 그리고 아련한 추억을 팬들 가슴에 새겨야 한다. 이런 점에서 최동원은 단연 독보적이었고 그래서 그는 한국야구의 영웅이자 전설이 됐다.

최동원의 야구 인생은 영웅 서사 구조와 아기 장수 설화의 조합으로 설명할 수 있다. 요컨대 미천한 가문에서 비범한 능력을 가진 아이가 태어나 온갖 고난을 겪게 되지만 마침내 영웅적인 위업을 이룬 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다는 식의 이야기다. 최동원은 야구 인생 대부분을 거의 ‘미천한 팀’에서 보냈다. 야구 명문으로 여겨지는 경남고만 해도 그렇다. 1940년대 네 차례 우승을 거머쥐며 명문 팀으로 군림했지만 1950년대·1960년대에는 각 1회 우승에 그쳤다. 그러다가 최동원이 입학하기 한 해 전인 1973년 청룡기 우승을 차지했고 최동원 재학 시 황금사자기와 청룡기, 두 번의 우승을 추가한다.

연세대 야구부는 최동원이 입학하기 전까지 고려대의 ‘밥’이었다. 정기 연고전은 1961년 5·16쿠데타 이후 중단됐다가 1965년 재개됐는데 1965년부터 1976년까지 연세대는 고려대에 1승 2무 6패를 기록했다. 6패는 중간의 무승부를 제외하면 6연패나 다름없었다. 아마 구단 ‘롯데 자이언트’는 신생 명문구단이라 할 수 있었지만 최동원은 1981년 단 한 시즌을 뛰며 구단의 기적 같은 우승을 이끌었다. 이제 남은 팀은 프로구단 롯데 자이언츠뿐이다. 명실상부한 명문 구단 삼성 라이온즈에서 1년간 선수 생활은 제외하기로 한다. 롯데 유니폼을 벗은 최동원은 최동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 해태·삼성 선수였다면

최동원의 롯데 시절을 말하려 하니 뭔가 울컥한 것이 치밀어 오르는 것 같다. 기회 있을 때마다 나는 ‘롯데 자이언츠 창단 어린이회원 활동’을 가장 자랑스러운 경력 중 하나로 말해왔다. 롯데 자이언츠에 대한 나의 사랑은 이런 가사에 빗댈 수 있을 듯하다.

“얼마나 얼마나 더 너를/ 이렇게 바라만 보며 혼자/ 이 바람 같은 사랑, 이 거지 같은 사랑/ 계속해야 니가 나를 사랑하겠니?”(현빈 ‘그 남자’ 중에서)

사랑은 폭풍처럼 휘몰아치다가도 무풍지대에 들어선 것처럼 잦아들고 사라진다. 이 거지 같은 사랑을 얼마나 계속해야 롯데가 우승할 수 있을까. 역설적이게도 롯데가 ‘거지 같은 팀’이 아니었다면 야구선수 최동원은 ‘평범한 전설’로 기억됐을 것이다. 40년 역사 한국 프로야구에도 ‘전설’은 꽤 있다. 선동열은 말할 것도 없고 양준혁도 이종범도 ‘신(神)’이라는 꼬리표가 붙는 ‘전설’임에 틀림없다.

이런 상상을 해본다. 최동원이 롯데가 아니라 해태나 삼성 선수였다면 어떤 야구선수로 기록되고 기억됐을까. 롯데 최동원은 1984년부터 2년 연속 20승 이상을 거뒀고, 1986년에는 20승에 1승이 모자란 19승에 그쳤다. ‘그쳤다’는 표현이 부적절하지 않은 것은 당시 롯데 구단 관계자가 ‘에이스라면 20승 이상은 해야 하고, 그 이하는 감봉 요인’이라고 발표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해태 또는 삼성의 최동원이었다면 3년 연속 20승은 따 놓은 당상이었을 테고, 투수 자원이 풍부했던 두 구단의 지원을 받으며 적어도 5년 연속 20승 투수가 됐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많은 사람이 동의할 것 같다. 그렇게 5년 연속 20승을 했다면 한국 프로야구사에서 영원불멸의 기록으로 남았겠지만, 최동원은 우리 기억에 남은 최동원이 아닐 것이 분명하다.

■ 난쟁이 사이의 거인

해태는 기아로 이어져 한국시리즈에서 무려 11번 우승했다. 삼성은 한국시리즈 자체를 없게 만든 전·후기 통합 우승까지 포함해 8회에 달한다. 해태의, 또는 삼성의 최동원이었다면 롯데에서 거둔 기록보다 월등한 성적을 냈다 해도 지금 같은 부산의 영웅, 한국야구의 전설이라는 위치에 오르지는 못했을 듯하다.

뇌과학 영역에서 보면 기억과 감정은 분리되지 않는다고 한다. 기억 장치 따로, 감정 장치 따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 감정이나 느낌과 결합될 때 가장 강력하게 뇌에 각인된다는 것이다. 어릴 적 넓게만 보였던 모교 운동장도 성인이 돼 다시 가 보면 그렇게 커 보이지 않는다. 최동원은 난쟁이 사이에 홀연 등장한 거인(巨人)과 같았다.

우리 모두가 난쟁이였던 시대였다. 최동원이 자신의 최전성기를 구가하며 국가대표로 활약하던 시절, 현대는 겨우 포니 자동차를 조립하고 있었다. 최동원이 롯데 에이스로 군림하던 시절은 삼성이 반도체를 만들며 ‘이게 도대체 팔릴까 안 팔릴까’ 반신반의하던 때였다. 한국이 일본을 이길 수 있는 건 ‘로보트 태권브이’가 등장하는 만화에서나 가능한 얘기였다.

그런 시대에 오직 최동원만이, 역시 최동원만이 ‘쟤는 일본에 가도 10승은 할 거야’ ‘아냐, 메이저리그에서도 통할지 몰라’라는 말을 들었다. 국가대표 경기에서 ‘쪽발이’를 이기고 ‘코쟁이’를 꺾는다는 건 불가능해 보이던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최동원이 있다면 기대를 걸어볼 만했다. 그는 그런 존재였다.

■ 우리에겐 최동원이 있었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은 영웅이 탄생하기 위해선 고난과 역경이라는 배경이 필요하다는 뜻도 된다. 그런 면에서 롯데는 최적의 ‘난쟁이 팀’이었다. 21세기에도 ‘이대호와 여덟 난쟁이’라는 말이 통용된 롯데가 아니던가. 최동원은 그런 팀을 홀로 이끌다시피 하며 누구보다 강렬한 인상과 감동 그리고 엑스터시와 카타르시스를 동시대인에게 선사했다.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모두 난쟁이였던 서럽고 가난했던 시절, 그래도 최동원이 있었다는 애잔하고 아련한 추억은 이제 전설이 된 지 오래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도 10년이 흘렀다. 앞으로도 무수한 스타가 나와 마운드에 오르겠지만 ‘야구선수’라는 일반명사가 어울리는 선수는 최동원 단 한 명뿐일 것이다. 그게 ‘야구선수 최동원’이 위대한 가장 큰 이유일 수 있다.

정범준 ‘거인의 추억’ ‘돌아오라 부산으로’ 저자

※공동 기획=국제신문 최동원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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