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높은 덕성으로 숭앙 받던 ‘영웅’
- 근·현대 스타에겐 중요치 않아
- 남 생각 않고 사적 성공만 초점
- 동료 선수들 처우 개선 노력 등
- 공공 가치 실현 나섰던 최동원
- 새 유형의 영웅 출현 연 선구자
- 좋은 가치 널리 전하는 BTS 등
- 현대 영웅 하나둘씩 나타나며
- 공동체와 교감하는 ‘덕성’ 귀환
작가 박경리 선생의 책 ‘일본산고’에 ‘삼국유사’ 속 ‘정수사구빙녀(正秀師救氷女)’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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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역 동백상회에서 파는 ‘최동원 마그넷’과 감천문화마을에서 산 ‘부산 사투리 자석’을 최동원 선수 사진 위에 조합해보았다. ‘부산 느낌’ 물씬 난다. 이원준 기자 |
“눈은 쌓이고 날은 저물고 정수(正秀)가 삼랑사에서 돌아오는 길, 천엄사 문밖을 지나는데 한 여자 거지가 애를 낳고 누워 있었다. 그냥 두면 얼어 죽기 십상이라, 정수는 따뜻한 체온으로 여인을 안아주니 얼마 뒤 깨어났다. 정수는 옷을 벗어 덮어주고 알몸으로 뛰어서 본사(本寺)에 돌아와 볏짚으로 몸을 덮고 밤을 지냈다. 중 정수가 벌거벗고 본사까지 달려가는 모습이 떠올라 빙녀의 비극보다 오히려 희극적 요소로 돋보이게 하는 글이었다.”(58쪽)
박경리 작가는 이 이야기를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괴승 벤케이와 그의 주군 미나모토 요시쓰네의 일화 등 일본이 간직한 오래된 이야기와 견주면서, 정수 스님의 따습고(체온으로 빙녀를 녹여주고 옷을 벗어준다) 웃긴 모습(점잖은 스님이 벌거벗고 절까지 뛰어간 뒤 볏짚을 덮고 잔다)에서 정과 해학을 좋아하는 한국의 심성·정서·미감·문화를 뽑아낸다. 그리고 이런 특성을 한민족 특유의 정서와 미감으로 자리매김한다.
문학가 박경리 선생은 인문의 눈으로 우리 주위 흔한 것을 재발견해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캐냈다. 이게 인문학자가 할 일이며 인문의 중요한 쓸모다.
■ 고대 영웅 ‘힘’ 중세 영웅 ‘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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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9월 30일 부산 사직야구장에서 열린 고 최동원 선수 등번호 11번 영구결번식. 국제신문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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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선수 최동원은 세월이 흐르면서 인간 최동원으로, 거인 최동원으로, 산맥 최동원으로 점점 존재감이 커져 왔다. 그는 가고 없는데, 왜 이럴까? 인문의 힘을 빌려 그 이유에 다가가고 싶었다. 이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스타와 영웅의 차이는 뭘까’ 하는 물음에 닿았다. 부산에서 활동하는 고전학자 정천구 박사와 나눈 대화가 그 계기가 됐다. 그는 2020~2021년 국제신문에 ‘삼국유사와 21세기 한국학’을 연재하고, 부산의 상지건축이 운영하는 상지인문학아카데미 유튜브 채널에서 같은 제목의 강좌를 진행했다.
“시대마다 인간상은 달라집니다. 고대는 문학에서는 신화시대입니다. 이때 영웅이 등장합니다. 고대 영웅에게는 전형성이 있죠. 고귀한 혈통, 태어날 때부터 지닌 영웅적 면모, 힘과 꾀, 반신반인(半神半人) 경지의 탁월한 능력, 고난 등인데요. 건국이나 그에 버금가는 거대한 업적을 이룹니다. 다만, 자기 민족이나 나라 안에서 숭배되는 경향이 있죠.” 논어, 맹자, 한비자, 대학, 중용의 번역·해설서를 냈고 ‘삼국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불교와 일본에 관한 책도 여러 권 우리말로 옮긴 정 박사의 설명을 더 들어보자.
중세로 오면 변화가 생긴다. 고대 영웅 대신 성자(종교적 영웅)가 등장한다. 종교적 영웅은 날 때부터 영웅 면모를 갖고 있지는 않다. 신분도 별 상관없다. 누구에게나 성자가 될 기회는 있다. 하지만 반드시 후천적 수행을 거쳐 덕을 쌓아야 한다. 중세 영웅에게 중요한 것은 힘과 꾀가 아니라 덕성이다. 덕은 보편성이 크다. 그러므로 중세 (종교적) 영웅은 국가·민족을 넘어 훨씬 큰 범위에서 숭앙받는다. 고주몽과 박혁거세는 한민족의 영웅이지만, 원효와 의상 스님은 한·중·일에서 다들 높인다.
■ 덕성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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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학자 정천구 박사. |
지금부터 변곡점이 온다. 중세 영웅·성자의 곁가지로 나오는 존재가 민중 영웅이다. 민중 영웅은 민중과 훨씬 친하고, 진하게 교감한다. 신분제사회인 중세에 민중 영웅이 나온다는 건 후천적 노력(예컨대 종교적 수행)으로도 위대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건데, 여기서 근대 이후의 스타가 나타날 바탕이 깔린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깔린 레드 카펫을 밟고, 근대 이후의 스타가 등장한다. 편의상 이들을 근·현대 스타라고 칭하자. 누구라도 재능과 노력으로 성공하면 엄청난 부와 명예를 누린다.
근·현대 스타와 중세 영웅의 차이는? 중세 영웅에게 중요하던 덕성이나 공공적 이익은 근·현대 스타에게 더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전성기 비틀스가 “우리는 예수님보다 유명하다”고 말했어도 전 세계 팬은 비틀스를 버리지 않았다. 권투 스타 마이크 타이슨이 ‘개차반’ 사생활을 살아도 이기면 돈이 쏟아져 들어왔다. 예외가 있었지만, 분명 그런 문화가 지배했다. 영역도 넓어져 배우·연예인·운동선수가 어마어마한 스타로 떠올랐다.
정 박사는 “그런 가운데 예외적인 스타가 나타나기 시작한다”고 지적했다. “사적인 명예와 성공에만 집중하는 스타를 넘어, 대중에게 (사회적· 공공적으로) 좋은 기운을 불어넣고 대중과 좋은 가치를 공유하고자 노력하는 스타들”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극명한 사례는 BTS(방탄소년단)다. 그들의 메시지, 그들이 아미와 나누는 교감, 그들의 생활과 지향을 한 번 떠올려보시라.” 공동체와 교감하는 ‘덕성’이 귀환한 것이다. 일종의 전환이다.
■ 차범근 김연아 손흥민…
“최동원은 그런 전환의 경계선에 있었던 사람 같아요.” 선구자 같은 존재라는 말로 들렸다. 앞장서서 그런 전환을 앞당겼다는 뜻이다. “스포츠 스타에게는 오로지 성적만 요구했고 구단은 그런 선수들을 도구처럼 마구 부리던 그 시대에, 탁월한 개인 능력만으로 엄청난 명예와 부를 홀로 누릴 수 있었던 최동원은 자기를 희생해가며 선수협의회 구성 노력 등 모든 선수가 인간적으로 대우받도록 하려고 애쓰지 않았습니까.” 이 대목에서 스타 최동원이 영웅으로 올라서는 느낌을 받았다.
선수협 출범 노력뿐만 아니라, 최동원은 선수 생활과 삶 전체에서 덕성을 발휘하며 ‘함께’를 실천한 현대적 영웅의 면모를 보였다. “알겠심더. 마, 함 해보입시더!”라는 최동원 대표 어록이 이를 함축한다. 정 박사는 “그렇게 선구자로서 앞서갔기에 그가 말년에 더 외로웠는지 모른다”고 덧붙였다. 원래 선구자는 외로운 법이니까.
그러나 최동원은 이제 덜 외로울 것 같다. 재능과 노력으로 성공해 명예와 부를 거머쥐기만 하면 ‘남’ 생각은 별로 안 해도 됐던 근·현대 스타 틈바구니에서 덕성을 갖추고 더 많은 사람과 함께 가려는 현대의 영웅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정 박사의 예시다. “축구의 차범근 같은 이도 최동원과 비슷한 길을 먼저 연 사람으로 본다. 유럽이 시스템으로 유소년 축구를 키웠다면, 차범근은 개인 덕성으로 일찌감치 유소년 축구 육성에 뛰어들지 않았나.” 생존과 성공을 향한 전쟁터인 유럽 무대에서 ‘독특하다’는 평을 받을 만큼 반듯하고 배려심 많은 모습으로 성공한 축구선수 손흥민도 있다. 은퇴한 지 꽤 됐지만 여전히 세계 스포츠계에서 존중받으며 조화롭게 살아가는 피겨스케이팅의 김연아도 떠오른다. 문득, 파기만 하면 선행·미담이 튀어나오는 배우 주윤발이 요즘 들어 성룡보다 더 잘사는 것도 같다.
■ 정수 스님 간직한 신라 백성
이렇게 보면, 최동원 선수를 기리는 최동원상이 제정된 게 우연이 아니다. 다시 ‘삼국유사’ 속 ‘정수사구빙녀’로 돌아간다. 정수 스님은 그 뒤 어떻게 됐을까?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진다. “한밤중에 궁정 뜰에 하늘로부터 외치는 소리가 났다. ‘황룡사의 승려 정수를 마땅히 임금의 스승에 봉할지니라.’ 급히 사람을 시켜 조사하게 하니, 그 사실이 모두 왕에게 알려졌다. 왕은 위의를 갖추고 그를 대궐 안으로 맞아들여 국사로 삼았다.”(‘삼국유사’ 감통 편) 여기 나온 ‘하늘로부터 외치는 소리’는 누구 목소리였을까? 백발백중, 당시 백성의 목소리다. 오늘의 시민이 최동원을 잊지 못하는 이유를 생각하면 단박에 알 수 있다.
※공동 기획=국제신문 최동원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