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도병1기로 육군병원 분원 근무
- 통도사 호국현충시설 지정에 기여
한국전쟁 당시 제31육군병원 분원이었던 통도사의 현충시설 지정을 기념하는 호국영령위령재가 지난달 통도사에서 열렸다. 분원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한 박기수(89) 옹도 행사에 참석해 의미를 더했다. 당시 육군병원 소속 부대원으로는 유일한 생존자다. 2019년 9월 25일 용화전 미륵존불 복장에서 발견된 연기문에는 6·25 발발 후 국군 상이병 3000여 명이 통도사에 들어왔고 2년 후 4월 12일 퇴거했다는 내용이 기술돼 있다. 통도사 주지와 총무원장을 역임한 구하스님의 친필이었다. 대광명전에서는 당시 입원한 군인이 남긴 필적이 발견됐다. 박 옹의 증언과 기록 등으로 인해 통도사는 호국현충시설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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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기수 옹이 통도사에 육군병원 분원이 있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이원준 기자 |
박 옹은 전쟁이 났을 때 고향인 진양군 미천면(현 진주시)에 있었다. 북 인민군이 고향까지 점령했다. 당시 인민군은 인민위원회를 조직, 가구마다 남자 한 명을 징집했다. 아버지가 인민위원회에 끌려가게 됐는데 “아버지보다는 자네가 가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미천면 인민위원장의 제안으로 아버지를 대신했다. 끌려가던 중 학교 선배인 강태홍 전 부산시장을 만나게 됐고 “이대로 끌려가면 공비로 남게 돼 다시는 고향으로 가지 못한다.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고 제안하자 마음이 흔들렸다. 당시 탈영하다 총에 맞아 죽는 사람을 봤던 그로서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평소 강 전 시장을 따랐던 터라 결심을 굳혔다. 밤을 틈타 탈출에 성공한 박 옹은 고향에 다시 돌아왔지만 학교가 문을 열지 않아 군에 입대했다.
박 옹은 진주중 5학년 때 학도병 1기로 자원했다. 위생병이 된 그는 마산여고에서 한 달가량 기본군사훈련을 받고 전방에 배치되기 위해 기차를 탔다. 그가 소속된 부대는 함경북도 청진이 주둔지였다. 대전에서 대기하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해 부산에 자리잡았다. 그는 “당시 창문도 없는 화물칸에 탔는데 기차가 출발하기에 ‘이제 전장으로 가는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누군가 ‘방향이 남쪽’이라고 했고 도착해보니 동래역이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는 “부산에 도착해 금정국민학교 인근 정미소에 머물렀고, 조금 있다가 부산대 자리에 200개 정도의 천막을 치고 생활하게 됐는데 이것이 제31육군병원의 시작이었다”고 증언했다. 박 옹은 이 병원에서 팔에 총상을 입은 강 전 시장(당시 소위)을 만났다.
박 옹은 “당시 통도사에 환자가 있었는데 이들을 보살피기 위해 군량미를 전달하는 게 내 임무였다. 부산대에서 통도사로 양식을 싣고 가다가 산에서 내려오는 공비에 의해 습격을 받기도 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러면서 “당시 환자들이 통도사 용화전 바닥에 누워 요양했다. 용화전 뒷산에서 내려오는 공비가 있어 경비부대가 배치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이어 “통도사에는 중환자보다 가벼운 부상을 당한 군인이 많았다. 이들에게 먹일 250명분 가마솥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박 옹은 ‘민주신보’ 견습기자로 기자 생활을 시작해 국제신문 동아일보 부산매일 서울신문 등을 거치며 약 40년을 신문사에서 보냈다. 정구를 좋아해 평생 정구를 즐겼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정구를 시작해 고교 대학 일반부 전국체전에 출전했다. 2007년에는 ‘정구와 함께한 인생’이란 수필집도 냈다. 한일친선정구협의회 회장과 부산시정구협회 고문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