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년대부터 市-민간 합작정책
- 갱생 명분 건설사업 강제 투입
한국전쟁을 전후로 부산에는 부랑인 시설이 난립했다. 31일 서울대 김일환 박사에 따르면 이 정책의 골자는 민간 시설을 활용한 분산·격리·수용이었다. 한센병 환자는 소록도 갱생원으로 보내졌다가 점차 남구(당시 부산진구) 감만동 상애원에 수용됐다. 사하구(당시 서구) 구평동의 ‘성화원’이나 을숙도의 ‘낙동갱생원’ 등 도심 바깥 지역에서 집단 정착촌이 형성되기도 했다.
1960년대 들어서는 본격적인 시-민간 합작 정책이 생겨났다. 소규모 민간 시설들은 수용 정원이 적은 데다 재정난도 심각해 안정적인 관리가 어려웠다. 여기에 전후 복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서 무허가 주택 철거나 도시 경관 정비 사업 등 본격적인 도시계획이 추진됐다. 이 과정에서 생겨난 부랑인을 수용하려면 행정당국이 관리할 수 있는 대규모 수용 시설이 필요했다.
수용된 부랑인은 ‘갱생’을 명분으로 시의 건설 사업 등에 강제로 투입됐다. 북구(당시 동래군) 구포읍에서 추진된 주택건설사업에 부랑인으로 조직된 강제 노역 집단 ‘금성개척단’이 활용된 게 대표적이다. 1962년 800명 규모의 부랑인 시설 ‘재생원’이 생겨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칠성원 덕성원 소년의집 등도 이 시기 규모를 키웠다.
부산 최대 인권유린 사태인 형제복지원 사건조차도 1975~1987년 피해 사례밖에 관리하지 않고 있다. 부산시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 명예회복 및 지원에 관한 조례’에 시기가 이처럼 못 박힌 탓이다. 그러나 형제복지원 또한 그 전신인 ‘형제보육원’은 1960년부터 운영됐다. 이 시기에 피해를 입었다는 신고 사례도 있다. 시 정귀순 인권위원장은 “시가 형제복지원 사건을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될 일로 여긴다면 이를 반성의 계기로 삼아 비슷한 피해를 본 다른 시설 수용자들의 진상 조사를 진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 ‘제2 형제복지원’ 영화숙·재생원 연혁 |
1951년 |
영화숙, 부산시 사하구(당시 서구) 동대신동에 50명 수용 육아 시설로 설립. 설립자 조봉귀 |
1954년 |
부산시의원 출신 김응수가 시설 인수 |
1962년 |
이순영 일가 임원진 취임. 장림동에 재생원(800명 규모) 신설 및 영화숙(400명 규모) 이전 |
1968년 |
‘부산시 재생원 설치 조례’ 제정, 부산시와 부랑아 수용 위탁 계약 체결 |
1970~71년 |
소 알로이시오 신부가 폭로한 학대·횡령 수사, 수용자 전원 조치. 부산시 위탁계약 해제 |
1971~75년 |
칠성원이 ‘재생원 조례’ 근거 새 위탁 계약(71~75년). 1975년 형제복지원이 위탁 계약 |
1976년 |
보건사회부, 영화숙 법인 등록 취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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