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냉이죽·보리밥 한덩이로 연명
- 양념불고기 실컷 먹어라” 눈물
- 인권유린 등 규명에 의기투합
“석주야! 네가 석주구나. 정말 잘 왔다. 너에게 밥 한 끼 꼭 해주고 싶었다. 네가 당한 일, 내가 잘 안다. 정말로 잘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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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년 만에 만난 영화숙·재생원 피해자 유수권(왼쪽부터), 손석주, 박상종 씨가 24일 부산 사하구 유 씨 자택에 모여 식사를 하고 있다. 이원준 기자 windstorm@kookje.co.kr |
24일 오전 11시 유수권(가명·68) 씨는 50여 년간 숨겨온 서러움을 비로소 쏟아냈다. 손석주(59) 박상종(65) 씨를 마주하는 순간 그는 터져 나오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들은 1960년대 부산지역 최대 부랑인 시설 영화숙·재생원에서 무자비한 폭력과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살아남은 피해자다. 세 사람은 이날 처음 사하구 하단동 유 씨 자택에서 만나 얼굴을 맞대고 밥을 먹었다.
식사 자리는 “영화숙·재생원에서 나와 똑같은 일을 당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 사주고 싶다”는 유 씨의 바람으로 마련됐다. 그는 손 씨가 털어놓은 당시의 기억(국제신문 지난 1일 자 1·6면 보도)을 신문으로 본 뒤 용기 내어 비참했던 삶을 증언했다.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접수된 영화숙·재생원 피해자는 지난 1년간 박 씨 뿐이었다. 형제복지원(부산)이나 선감학원(경기)과 달리 피해가 알려진 게 없어 자신과 똑같은 일을 당한 누군가를 만나 위로하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다.
밥상에는 숙주 우삼겹 볶음과 돼지 양념불고기가 올랐다. 유 씨가 하단오일시장에서 장 봐온 음식들이다. 동생들에게 고기반찬을 대접하고 싶은 큰형의 마음이 담겼다. 유 씨는 “지금이야 흔한 음식이지만, 그때 우리는 죽 한 그릇 배부르게 못 먹었다. 영화숙·재생원에선 구경도 못 해본 고기를 실컷 먹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들은 소년의 몸으론 견디기 힘든 강제노역에 시달렸지만, 식사는 강냉이죽이나 보리밥 한 덩이로 하루 두 끼만 겨우 먹었다.
푸짐한 만찬상을 앞에 둔 세 사람은 굶주려 죽지 않기 위해 뭐든 먹어야 했던 기억을 주고받았다. “형님, 저는 밭에서 돌게 잡다가 난데없이 재생원으로 끌려와선 2년 반을 잡혀 살았어요. 늘 배가 고팠어요(박 씨).” “알지, 나도 밥 사준다는 아저씨 따라가선 영화숙에 5년을 지냈다. 얼마나 못 먹었는지, 방에 쥐가 지나면 ‘왕건이’라면서 온 원생들이 달려들었어(유 씨).” “미군들이 간식을 주고 가면 직원들이 모조리 압수해가는 통에 맛도 못 봤어요(손 씨).” 난생처음 자신의 아픔을 알아주는 동지를 만난 이들은 한참을 서로 맞장구치며 웃음꽃을 피웠다.
영화숙·재생원(1962년~1972년)은 형제복지원(1975년~1982년)에 앞서 존재한 부산의 부랑인 시설이다. 집단적 인권유린의 양상과 정도는 형제복지원과 다르지 않았다. 군대식 통제와 고된 노역, 열악한 식사에 매일같이 누군가가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50년 전에 시설이 사라져 당시를 증명할 자료가 매우 부족하다.
이들은 영화숙·재생원에서의 인권유린 실태를 규명하려면 먼저 피해자들이 모여 연대해야 한다고 뜻을 모았다.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이 서로 힘을 합해 오랜 시간 목소리를 내온 끝에 진상규명 결실을 본 것처럼, 영화숙·재생원 생존자들 역시 구심점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형제복지원은 2013년 10월 피해자들이 진상규명 대책위원회를 만든 후 약 9년 만인 지난 8월 진상이 규명됐다.
이날 모임은 영화숙·재생원 피해 생존자들의 연대 구성을 위한 초석이 될 전망이다. 손 씨는 “보도를 계기로 영화숙·재생원 피해자들이 서로를 알게 됐지만, 여전히 그 수는 매우 적다. 단체를 만들려면 더 많은 피해자를 찾아야 한다”며 “여러 정당에 문의해 피해 사실 규명을 도와줄 방법을 묻고 있다. 다른 집단시설 피해 단체에도 방법을 자문 중이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