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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살아 돌아오자며 걸어놓은 지폐…73년째 주인 기다려”

UN공원에 잠든 용사들…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2 <2> 뉴질랜드 故 로버트 콤프턴

  • 김진룡 기자 jryongk@kookje.co.kr
  •  |   입력 : 2023-05-15 20:22:46
  •  |   본지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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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살 친구들과 참전 도원결의
- 다른 이는 생환해 지폐 찾았지만
- 로버트만 고국으로 못 돌아와

- 겨울 얼어붙은 도로 운전 힘들어
- 포병 보직전환 신청해 전투 참여
- 포탄사고로 다쳐 하루 만에 숨져

- 뉴질랜드서 삼촌 기리는 조카
- “삼촌의 희생으로 지켜낸 한국
- 좋은 나라 발전해 자랑스러워”

“삼촌은 6·25전쟁에 떠나기 전 레이크 페리 호텔 술집에서 친구 두 명과 작별의 술잔을 나눴습니다. 다시 돌아올 것을 맹세하며, 각자 뉴질랜드 1파운드 지폐에 함께 서명을 남겼죠. 누군가 전사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이 돈이 술집 손님에게 음료를 제공하는 데 쓰이길 바란다는 이야기도 술집 직원에게 전했습니다. 친구 2명은 생환해 지폐를 찾아갔지만, 삼촌의 돈은 70년 넘게 이곳에 남았어요.”

뉴질랜드 북섬의 레이크 페리 호텔에서 만난 맨디 맥케이(여·69)가 슬픔 가득한 얼굴로 삼촌 로버트 콤프턴(애칭 밥)이 남긴 1파운드 지폐를 살펴봤다. 술집 한쪽에 나무 틀과 유리로 된 케이스에 보관된 1파운드 지폐에는 삼촌과 친구들이 남긴 서명이 여전히 선명했다.

“삼촌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이 돈은 쓰이지 않았습니다. 처음엔 안작데이(ANZAC Day) 때 삼촌을 추모하는 양귀비를 사는데 사용해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30년 뒤 레이크 페리의 재향군인 자문위원회는 삼촌을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해 영구히 이 지폐를 보관해야 한다고 결정했죠.” 안작데이는 뉴질랜드와 호주에서 1·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등에 참전한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군단(Australia New Zealand Army Corps)의 군인 등을 추모하는 날이다. 매년 4월 25일이다.
로버트 콤프턴의 1파운드 지폐.
■뒤바뀐 운명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터지자, 뉴질랜드에도 이 소식이 전해졌다. 맨디의 삼촌 밥은 레이크 페리의 한 농장에서 두 형(릭스 라이오넬)과 일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밥의 친구 미타 카터, 데이브 테 마리가 6·25전쟁 참전 의사를 밝혔고, 밥도 함께 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세 친구는 레이크 페리 호텔 술집에서 회동했다.

“그때 삼촌 나이가 23살이었으니 어떻게 보면 모험심으로 참전을 결정했었던 것 같아요. 전쟁이 장난이 아니란 건 알았다고 합니다.”

뉴질랜드 레이크 페리 호텔 술집에 보관된 로버트 콤프턴의 사진.
전쟁터로 나간 밥은 원래 전쟁 물자 등을 수송하는 운전병이었다. 농장에서 트랙터를 몰았던 경험을 살렸다. 8개월간 운전을 했는데 전쟁터였던 한국 도로 상황은 좋지 않았다. 특히 겨울철 얼어붙은 도로에서 운전하는 일은 고역일 정도로 힘들었다. 밥은 포병으로 보직 전환을 신청했다. 상부의 허락이 떨어졌고 2주간 포병 교육을 받았다.

포병이 됐지만 전선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1951년 11월 밥이 속한 부대는 임진강을 건넜다. 부상자가 속출했다. 한 달 전에는 경기 가평 전선에서 상황이 좋지 않았는데 이번엔 더 나빴다. 이전에는 가벼운 사격이 주로 있었는데, 이제는 머리 위에서 포탄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전쟁의 느낌이 더 강해졌다. ‘정전을 위한 협상을 진행한다’는 이야기가 일선에도 전해졌지만, 별다른 진척은 없었다.

“삼촌은 전사하기 나흘 전 고향 친구들에게 편지를 썼는데, 당시 상황을 자세히 적었습니다. 삼촌은 보직이 바뀐 것과 관련해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어요. 별다른 사고가 없어 다행이란 이야기도 전했습니다.”

밥의 행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밥은 1951년 11월 23일 오전 임진강 인근에서 25파운드 포를 운용하며 적에게 포탄을 발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뉴질랜드군의 포탄 한 발이 포신 밖에서 터졌고 밥을 포함해 이를 다루던 포병들이 다쳤다. 밥은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 결국 다음 날인 11월 24일 숨을 거뒀다. 밥의 전사 소식은 1952년 1월 4일에서야 레이크 페리 호텔로 전해졌다.

밥의 가족은 충격에 빠졌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를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맨디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벽난로 선반에 제복을 입은 그의 사진을 걸었던 게 생각나요. 그가 전쟁에서 돌아왔으면 아마 형제들이 그랬던 것처럼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을 거예요. 90대까지 살았던 큰 삼촌인 릭스와 둘째인 저의 아버지 라이오넬처럼 오래 건강했을 것입니다”고 말했다.

■영원히 찾지 못하는 1파운드

로버트 콤프턴의 훈장.
세월이 지나도 밥의 이야기는 이곳에 계속 남아 있다. 맨디는 레이크 페리 호텔 앞 한 공터로 취재진을 안내했다. 이곳엔 보어전쟁, 1·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에 참전해 전사한 지역 참전용사를 추모하는 비석 등이 마련돼 있다. 밥의 이름도 이곳에 새겨져 있다. 맨디는 삼촌을 추모하는 의미를 담아 로즈마리를 조용히 비석 위에 놓고 묵념했다.

“저도 전쟁을 겪은 세대는 아니라 한국전쟁을 잘 몰라요. 다만 끔찍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도와줄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북한의 침략에 한국을 지킨 것을 뉴질랜드군과 호주군은 자랑스럽게 생각했을 것 같아요.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맨디는 삼촌의 이야기를 담은 지역신문 기사도 소개했다. 2001년 4월 26일 쓰인 이 기사는 삼촌과 레이크 페리 호텔 술집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삼촌을 직접 전쟁터에서 봤던 한 참전용사의 이야기도 담겼다. 한국전쟁 참전용사인 뉴질랜드 마틴버러 출신의 존 터너는 2001년 안작데이 때 레이크 페리 호텔 술집에서 열렸던 밥의 추모 행사에 참석했다.

존 터너는 이 기사에서 “저는 밥이 가고 1년 뒤 한국전쟁에 참전했습니다. 밥이 다친 그날 저는 오전 11시 기지로 돌아왔고 그의 부상 소식을 들었죠. 다음 날 그는 결국 전사했어요. 그가 전사하기 전 한국에서 그를 알고 지낸 사람은 지금 여기에 저밖에 없는 것 같네요”라고 밝혔다. 마틴버러는 레이크 페리에서 북동쪽으로 30㎞ 정도 떨어진 지역이다.

■대를 이어 삼촌을 추모

뉴질랜드 레이크 페리 호텔 에서 맨디 맥케이가 삼촌 로버트 콤프턴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김태훈 PD
맨디는 2004년 삼촌을 찾아 80세 고령이었던 아버지 라이오넬의 손을 잡고 부산을 방문했다.

“아버지는 한국 사람이 뉴질랜드 참전용사에 보내는 존경과 감사를 보고 많이 놀라셨어요. 우리는 삼촌의 묘가 있는 유엔기념공원에서 추모 의식을 올렸고, 한국 측의 환대를 받았습니다. 한국으로부터 받은 초대가 영광이었습니다.” 그는 이어 “저는 우리가 모두 평화롭게 살기를 바랍니다. 전쟁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 해요”라고 덧붙였다.

맨디는 이제 삼촌을 잊지 않기 위해 관련 기억과 유품 등을 잘 보존해 자식 세대에게 전하고 있다. “제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삼촌 유품을 물려주셨어요. 저도 이제 삼촌과 관련된 기억과 유품을 자식 세대에게 건넬 겁니다. 제 아들이 40세인데 가족의 역사를 보존하는 일을 중요하게 느끼고 있어요. 아들 가족이 다 함께 삼촌 추모 행사에 참석했습니다.”

맨디는 삼촌에게 하고 싶은 말도 아끼지 않았다. “삼촌, 삼촌의 용기를 자랑스러워했으면 좋겠어요. 북의 침략에 맞서 남을 지킴으로써 한국인에게 더 나은 삶을 제공한 것도 자랑스럽게 생각하세요. 삼촌이 더 큰 것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게 자랑스러워요. 그 덕분에 한국이 더 좋은 나라가 된 것 같아요.”

뉴질랜드 레이크 페리=김진룡 기자

영상=김태훈 PD

※제작지원 : BNK금융그룹

※취재협조 : 재한유엔기념공원관리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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