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을주민 이어주는 구심점 역할
- 화투·바둑·장기 등 다양한 활동
- “그냥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좋아”
- 일부 경로당 독거노인 식사봉사
- 초·중학생 초대 돌봄 활동 진행
- 입회비 등 부담에 외면하는 이도
국제신문 77번 버스가 세 번째 행선지 부산진구 개금동 경로당을 찾았다. 경로당은 노인의 대표적인 여가복지시설로 친목 회합 운동 등이 이뤄지는 곳이다. 그 마을 네트워크의 핵심이자, 아파트로 비유하면 일종의 커뮤니티 시설인 셈이다. 그러나 경로당에 가고 싶어도 텃세 탓에, 비용 탓에 이용하지 못하는 어르신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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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금정구 구서1동부녀경로당 회원들이 지난 26일 관내 독거노인에게 전달할 육개장 포장하고 있다. 이들은 매월 2회 관내 독거노인을 위한 도시락을 마련하고 있다. 이원준 기자 windstorm@kookje.co.kr |
■겨울엔 따시고, 여름엔 시원코부산 부산진구 개금3동 일진경로당 앞은 국제신문 77번 버스에 오르려는 노인으로 북적였다. 길을 지나던 한 노인은 “오늘 무슨 잔치 났나 보네”라며 다른 노인과 인사를 주고받았다. 경로당은 안팎을 가리지 않고 마을 주민을 잇는 구심점 역할을 했다.
어르신에게 집 근처에 경로당이 있다는 건 행운이다. 일진경로당에 매일 출근 도장을 찍는다는 김봉엽(86) 할머니도 마찬가지다. “나이 먹으면 몸이 좋아졌다 나빠지기를 반복하는데, 이제 동네 한 바퀴 돌기가 어려워예. 집 근처에 경로당 없었으면 진짜 큰일 날 뻔했습니더. 20년 전부터 매일 경로당에 빠지지 않고 다니는데 이만한 데가 없습니더.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에어컨이 있어 시원해 놀기 좋다 아입니꺼. 쌀도 있고 반찬도 있으니, 밥도 해 먹으면서 놀지예. 뭘 안 해도 그냥 가서 앉아 있기만 해도 좋아예.”
경로당에는 활동별로 다양한 파벌(?)이 나뉜다. 경로당에는 TV 앞에서 수다를 떠는 ‘수다파’가 최대 파벌이다. 쌈짓돈으로 고스톱을 치는 ‘화투파’도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앉아서 하루를 보내는 ‘안빈낙도파’도 적지 않다. 할아버지 경로당에는 ‘장기·바둑파’가 주류다. 어르신들은 특정 파벌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놀거리를 옮겨 다니며 하루를 보낸다.
부산에는 2416개(지난 5월 기준)의 경로당이 있다. 이들 경로당은 정부와 지자체 등으로부터 예산 지원을 받는다. 10여 명이 등록된 일진경로당은 국·시·구비로 연간 약 500만 원을 지원받는다. 이 지원금으로 전기세도 내고, 냉·난방도 하고, 비품도 사고, 음식도 사서 이웃과 나눠 먹는다.
그러나 등록되지 않는 경로당도 많다. 개금3동 화목경로당이 그런 사례인데, 무허가 건물이라 ‘미등록 경로당’으로 분류된다. 미등록 경로당은 운영과 관련해 국·시비 지원을 받긴 하지만, 영수증을 먼저 제시해야 지원금을 받는 등 증빙이 까다롭다. 다만 시·구비로 최소 운영 경비 등을 지원받는다. 화목경로당에는 월 20만 원이 지원된다.
이곳을 운영하는 강명희(87) 할머니는 경로당이 없어질까 봐 항상 노심초사한다. 강 할머니는 “수십 년 전에 철도 땅에서 동네 사람들이 주머닛돈을 한 푼 두 푼 내서 만들었어요. 그렇다 보니 동네 사람 모두가 회원이라 생각하고 누구에게나 물이나 커피를 대접합니다.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하는데 무허가라 언제 없어질지도 몰라서 늘 조마조마한 마음이지요”라고 말했다.
■봉사열기로 활기까지 챙겨 |
| 부산 금정구 구서1동부녀경로당 회원들이 경로당에서 고무줄을 활용한 요가 프로그램을 하고 있다. 경로당 제공 |
일진경로당이나 화목경로당이 동네에서 친숙하게 볼 수 있는 ‘평범한’ 경로당이라면, 금정구 구서1동부녀경로당은 이른바 ‘잘나가는’ 경로당이다. 지난해 10월 대한노인회 부산시연합회가 주최한 ‘제2회 경로당 여가박람회’의 모범경로당 우수사례 발표회에서 최우수상을 차지하는 등 사회·봉사활동에 적극적이다.
지난 26일 취재진이 찾은 날도 이 경로당은 관내 독거노인에게 전달할 육개장 마련에 한창이었다. 얼큰하고 시원한 국 냄새가 코끝을 괴롭혔다. 식재료를 다듬던 한 할머니는 “어이, 기자 총각. 이거 한번 먹어 봐라. 어떻나. 아직 나가서 장사해도 되겄제”하고 호탕하게 웃었다.
이날 구서1동부녀경로당에서 만든 육개장 수십 그릇은 모두 바로 옆 구서1동 행정복지센터로 전달됐다. 구서1동부녀경로당은 한 달에 두 번씩 이같이 관내 독거노인에게 전달할 도시락을 손수 만든다. 어린이집 초·중학교의 아이를 경로당에 초대해 함께 놀면서 ‘1(할머니)·3(손주) 세대’ 교류 프로그램을 진행해 지역 돌봄의 일부도 담당한다.
구서1동부녀경로당 이열호(72) 할머니는 “아직 ‘젊은’ 노인 아닙니까. 집에서 노느니 경로당에서 즐겁게 주변 사람 도우면서 사는 거죠. 우리보다 어려운 사람, 애들 볼 시간 없어 힘든 맞벌이 부부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서로 좋죠”라고 말했다. 이 할머니는 “특히 1·3 세대 교류 프로그램에 참여하면 너무 행복합니다. 우리도 손주 생겨서 좋고, 아이들도 이곳에 오면 우릴 친할머니처럼 여기고 좋아합니다. 이게 우리한테는 쉬는 거고 여가입니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경로당 외면하는 노인도이처럼 경로당은 노인 여가의 ‘전통의 강호’지만, 이곳을 찾지 않는 노인도 있다. 부산진구에 거주하는 이모(84) 할머니도 그들 중 하나다. 이 할머니는 사상구에서 한평생 살다 2022년 부산진구로 이사왔다. 맨 처음 동네 경로당부터 찾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이미 터를 잡은 노인들의 홀대였다.
이 할머니는 “주변에 친구도 없고 이사도 온 김에 정 붙일 경로당이 없나 싶어 찾아갔는데 못 들어오게 하더라구. 사람들이 얼마나 잘난 체하던지, 나도 기분이 나빠서 그냥 돌아왔지”라고 말했다. 대신 이 할머니는 인근 노인복지관에서 매주 화·목요일 진행하는 무료 서예 교실에 다니고 있다. 이 할머니는 “작년부터 갔는데 사람을 많이 사귀었어. 경로당은 나하고 안 맞나봐”라며 쓴 입맛을 다셨다.
정치 이야기도 경로당 출입을 가로막는 이유 중 하나다. 서구 김모(81) 할아버지는 “경로당에서는 빠질 수 없는 게 정치 얘기야. 정치인 중에 누가 잘했니 못했니 이야기하면서 싸우는 일이 많아. 내 생각과 다른 말을 하루 종일 듣기도 지겹고, 그렇다고 별로 친하지 않은데 언쟁하긴 싫고. 차라리 원래 알던 친구들과 만나서 노는 게 편해”라고 말했다.
경로당이 받는 입회비와 월회비도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노인에게는 진입 장벽이다. 대한노인회의 정관에 따른 경로당의 입회비와 월회비는 각각 2만 원, 5000원 이내다. 기초생활수급자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경우 이사회 의결로 입회비나 회비를 감면할 수 있다. 일부 경로당은 사정에 따라 입회비와 월회비 없이 운영되기도 한다.
연제구 박모(78) 할아버지도 월회비가 부담스럽다며 손사레쳤다. 박 할아버지는 “경로당에서 친구도 만나고 싶고, 여자 친구도 사귀면서 즐겁게 살고 싶지. 그런데 나는 매달 나오는 기초연금이 수입의 전부라 매달 내는 월회비도 아깝단 말이야”라면서 “차라리 그 돈이면 손주한테 과자를 사주는 게 나아. 나는 그냥 집 근처 공원에 나와서 시간 때우는 게 편해”라고 말했다.
※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취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