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아가신 조부 재심서 무죄 끌어내
- 과거사 연구·기록 남기기 계속 진행
1960년 4·19혁명은 전쟁과 분단이 만든 금기를 깨뜨렸다.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자 그간 억눌렸던 민주화 요구가 폭발적으로 분출됐다. 두 갈래로 찢어진 조국의 산하를 다시 하나로 합칠 방안으로 평화적 통일이 본격적으로 거론됐다. 국군과 경찰의 학살로 목숨을 잃은 양민의 진상을 규명하고 위령제를 지내자는 움직임도 유족들에 의해 전국에서 전개됐다. 4·19 전에는 이적 행위로 몰렸을 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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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민 변호사가 1961년 혁명재판소 관련 피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신심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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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이 연 평화의 공론장은 이듬해 5·16군사정변으로 폐허가 됐다. 1961년 혁명재판소와 혁명검찰부를 발족한 정권은 통일운동가 등을 잡아들였다. 이들이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이유였다. 법무법인 대한중앙의 정민(46) 변호사의 조부도 누명을 썼다. 그의 할아버지인 고 정순종 씨는 독립운동가로,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 창립에 참여해 경남협의회 의장도 지냈다. 단지 이 사실만으로 그는 징역 5년을 받아 복역 중 옥사했다.
정 변호사는 “할아버지는 여운형 선생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도 참여했다. 할아버지는 권총 찬 경호원 보호를 받던 사람이어서 아버지는 ‘이대로 크면 나도 사회의 큰 사람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며 “그런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군대에선 ‘빨갱이 아들’로 불렸고, 취업에 불이익을 당했다”고 말했다.
당시 9개월 만에 697명이 체포·구금돼 혁명재판소 재판대에 섰다. ‘1호 사건’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은 사법 살인을 당했다. ‘2호 사건’ 국제신보(현 국제신문) 이병주 주필은 10년형에 처해졌다. 다행히 2006년 이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관련자들의 진실을 규명하면서 재심 길이 열렸다. 정 변호사는 할아버지를 위해 재심에 나서 2021년 1월 무죄를 이끌어냈다.
정 변호사는 2건의 재심 사건을 추가로 맡았다. 할아버지의 재심 소식이 알려지자 피해자 유족들이 ‘억울함을 풀어달라’며 그를 찾아온 것이다. 정 변호사는 “할아버지와 함께 민자통 활동을 한 유혁 선생의 자손이 찾아왔다. 2023년 7월 무죄가 나왔고 현재 국가 상대 손해배상소송을 진행 중”이라며 “지난해에는 문대현 선생의 며느리를 통해 재심을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문 씨는 보도연맹 사건 당시 군경에 목숨을 잃은 이들의 진상규명 등을 위해 발족된 ‘피학살자유족회’ 임원으로 활동하다 혁명재판에 부쳐졌다. 징역 10년에 처해진 문 씨는 투옥 중 유명을 달리했다.
정 변호사는 지금이라도 피해자의 명예를 찾아줘야 한다고 믿는다. “남북 분단의 이념에 의해 피해를 입은 분들이 많습니다. 빨갱이라고 뒤집어 씌워서 누군가를 패가망신하게 한 사례가 수두룩하죠. 수천 명의 사람이 영장 없이 경찰에 잡혀갔습니다. 공소사실의 증거도 없이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할아버지는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구호를 외쳤다는 이유로 투옥됐습니다.”
여러 재심 사건을 진행하면서 정 변호사는 누구보다 많은 경험을 갖추게 됐다. 전문성을 활용해 기회가 닿을 때마다 피해자들을 돕고자 한다. 그는 “할아버지 사건을 맡으면서 과거 역사를 찾고, 진실화해위가 정리한 3000쪽 분량 보고서나 혁명재판소가 발간한 ‘혁명재판사’를 여러 차례 연구했다”고 밝혔다. 이어 “여러 사정을 잘 이해하고 있어 관련 사건을 계속 진행할 생각”이라며 “언젠가 할아버지나 문대헌 선생 등에 관한 글을 쓰려 한다. 그렇게 기록으로 남겨놓는 것이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