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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삼의 인생 이모작…한 번 더 현역 <78>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원 이해인 수녀·시인(상)

광안리를 사랑한 수도자, 기도의 詩로 길 잃은 영혼 치유

  • 고영삼 인생이모작포럼 공동대표
  •  |   입력 : 2026-01-13 18:54:00
  •  |   본지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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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소자 등 많은 이의 편지 간직
- 맑은 마음 찾는 고백 외면 못해
- 글과의 만남, 마치 기도와 같아

- 위로 받으려 찾아오는 사람들
- 그 내면 속 예수님 만나며 수행

- 광안리 바다는 마음의 어머니
-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 50주년
- 글로 대신 울어주는 사명 지속

광안리 겨울 바다는 차갑지만, 햇빛이 바다 위에 부서져 윤슬을 만들 때는 가슴이 따뜻해진다. 이번에는 광안리 바다가 보이는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원의 한편 ‘해인글방’을 찾았다. 민들레 한 송이에서 시작된 한 여성 수도자의 글이 반세기를 건너 오늘 빛나고 있는 현장이다. 이해인 클라우디아 수녀의 시가 오랫동안 우리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그녀가 삶의 고독을 기도로 다듬어 시적 경지로 승화시켜 왔기 때문이다. 과연 그런 시의 경지를 가능하게 한 수녀 시인의 세월의 결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번에는 특별판으로 상, 하편 두 번에 걸쳐 진행하고자 한다.



‘해인글방’의 오후. 부산 광안리 성 베네딕도 수녀원에서 이해인 수녀가 기도하듯 녹차를 따른다. 찻잔 곁에는 최근 다시 펼쳐 든 국어사전이 놓여 있고, 그 뒤로는 전국의 독자들이 보내온 선물과 카드·그림·책이 조용히 공간을 채우고 있다. 김홍희 사진작가 제공
-여기가 그 유명한 해인글방이군요. 책과 액자도 많지만 수녀님에게는 유명한 사람이거나 평범한 사람들의 편지도 끝없이 온다지요. 편지를 읽다 보면 공통된 점이 보이나요.

▶형편은 다 달라요. 문인도 있고 유명한 사람도 있어요. 시 독후감도 있어요. 물론 모르는 평범한 사람들도 많아요. 사연은 다르지만, 편지를 오래 읽다 보면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모이더군요. ‘내가 의미 있는 사람인가’ ‘나는 여전히 사랑받을 수 있나’ 병든 사람도, 실패한 사람도, 죄를 지은 사람도 자기 존재가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고 확인받기를 원합니다. 저는 답을 주기보다, 그 질문을 혼자 두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해인글방은 수녀원의 정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하얀색 건물 1층에 남향으로 자리해 있다. 여러 개 방으로 구획된 60여 평 남짓한 실내에는 책 액자 사진 그림이 정말 엄청나게 많다. 뒤편 문을 열고 들어선 한 실에는 수녀님을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의 편지글이 수십 년의 세월을 안고 있다.



-지난 연말에는 감옥에 있는 유명한 재소자로부터도 편지가 왔군요. 교도소에서 오는 편지들은 무게가 다를 것 같습니다. 편지를 감당하는 일이 힘들지는 않으신가요.

▶그와 편지 대화는 이미 오래된 일입니다. 처음엔 힘들었습니다. 어떤 날은 봉투를 여는 것 자체가 망설여집니다. 하지만 그분들의 편지에는 공통된 고백이 있었습니다. “내 안에도 아직 맑은 마음이 남아 있을까요”라는 물음이지요. 그 질문을 외면하면, 제 신앙도 함께 공허해질 것 같았습니다.



-수녀님은 수도 생활에 ‘은둔과 고독이 필요하다’고 하셨는데, 글방은 독자들과의 만남의 방이기도 합니다. 고독과 만남의 균형은 어떻게 잡으셨나요.

▶처음엔 쉽지 않았어요. 수도원은 아무래도 내부 지향적이나, 글방 소임은 외부로도 눈길을 줘야 하니까요. 그러나 알고 보니 같은 것이더군요. 기도와 침묵으로 하루의 뼈대를 세우고, 그 위에 글과 만남을 얹었습니다. 글과 만남도 알고 보니 기도였습니다.



‘영원의 철학’을 쓴 올더스 헉슬리는 삶을 경험의 축적이 아니라, 경험에 대한 해석의 축적이라 했다. 고독을 피하는 사람에게 고독은 외로움의 형벌이지만, 고독을 다듬는 사람에게 고독은 성숙의 친구가 된다. 수녀에게 고독과 만남은 기도의 다른 언어인 것 같다.



-젊은 시절에는 방문객에게 까칠했었다는 고백도 하셨죠.

▶수도자로서의 정체성이 흔들릴까 염려스러웠던 때문이었습니다. 시인으로 알려지는 일이 부담스러워서 사람을 피하기도 했죠. 그런데 어느 순간 위로를 받고 싶어 찾아오는 사람들을 박절하게 대했을 때 그 후회스로움이 참 오래 가더군요.



-그 태도가 바뀌는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습니까.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사람은 오늘 나를 귀찮게 하러 온 게 아니라, 오늘 나에게 맡겨진 사람일지도 모른다. 예수님도 결국 인간을 위해 세상에 오셨고 그렇게 치유의 역할을 하신 것처럼 나도 찾아오는 사람에 대해 그분 안에 있는 예수님을 보자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나름의 수행법이 생긴 겁니다.



-많은 사람이 수녀님을 생각할 때 광안리를 함께 생각합니다. 수녀님에게 광안리 바다는 무엇입니까.

▶광안리를 자주 찾으니 광안리 바다가 저의 마음의 어머니 같은 역할을 한 거죠. 마침 광안리의 뜻이 넓은 광(廣), 편안할 안(安) 자로서 사랑의 좁은 길을 넓은 마음으로 달려가는 거니까 수도 생활과도 맞죠. 광안리는 여러 번 시로 표현했지만 없어서는 안 될 마음의 고향 같은 존재가 되었어요.



-해인이란 성함도 거기서 나온 거죠.

▶제가 1남 3녀 중에서 셋째인데 언니와 오빠는 각각 인숙 인구예요. 부모님께서 그들에게는 어질 인(仁) 자 돌림을 주시고, 저에게는 동생 경숙이와 함께 명숙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셨어요. 가톨릭 잡지에 동시를 투고할 초기에는 명숙이라고 썼었어요. 그런데 광안리 해변을 너무나 사랑하게 되어 이곳을 의미하는 해(海)에다가 인(仁)을 넣어 필명을 이해인으로 했는데, 이젠 이게 본명처럼 되어버렸어요.



-수도자로서의 초심을 지키면서도 대중의 참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계신 것은 부산 사람들에게 참 의미가 깊다고 봅니다.

▶제가 60여 년이나 이곳에 살았는데도 많은 사람이 제가 서울에 산다고 생각하고, “부산에 언제 오셨어요”라고 물어보시는 분이 계세요. (다 함께 웃음) 그런 한편 제게 기도의 거울이요, 생활의 종소리가 된 광안리를 생각하시고 해변에 시비(詩碑)를 만들고 싶다는 분들도 계십니다. 오늘은 미국 위스콘신에 사는 독자로부터 하느님의 사랑과 기쁨을 가진 안부를 받았습니다. 광안리는 제게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이 해변에 스며들어 평화와 감사의 숨결을 세상과 나누는 통로입니다.



생각해 보니 60여 년을 광안리에서 길어 올린 시어로 사람들을 위로해온 시인의 시비가 광안리에 없음은 정말 역설이었다. 그녀의 시는 교과서에도 올라가 있고, 전국의 산과 공원에 시비로도 서 있지 않은가. 지금이라도 광안리의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원의 해인글방과 광안리 해변을 수녀 문학의 상징적 공간으로 만든다면 세계 속의 도시로서 품격을 높일 문화자산이 될 것 같다.



-올해가 ‘민들레의 영토’가 나온 지 50주년이지요. 유명세로 인해 10년간이나 고통을 받기도 했다고요.

▶1976년 2월 15일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를 출간했죠. 그 후 지금까지 30여 권의 시집 동시집 산문집 번역서를 펴냈습니다. 글을 읽으며 원인 모를 눈물을 흘렸다는 편지부터 시작하여 정말로 많은 편지를 받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베스트셀러 목록 10권 중에서 1번부터 4번까지가 저의 책이었어요. 젊어서는 갑자기 찾아온 유명세에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책이 안 팔리게 해달라고 기도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수녀님의 시가 역경 속 사람들에게 위로가 된다면, 그것도 종신서원의 뜻에 부합하지 않나요.

▶그렇죠. 수도자는 숨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드러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드러남의 목적이 ‘나’가 되면 위험해집니다. 시가 기도가 되려면, 이웃의 울음을 먼저 들어야 해요. 그래서 저는 글을 쓰기 전, 늘 제가 대신 울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떠올립니다.



-‘글이 기도가 되는 길’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신다면요.

▶기도의 시는 있는 그대로의 마음으로 정직해야 합니다. 꾸민 말은 아름다워 보이지만 오래 못 가요. 그리고 말이 많아지면 기도가 얕아짐을 기억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기도는 순종이에요. 내가 쓰고 싶어서 쓰는 날도 있지만, 쓰기 싫어도 누군가를 위해 써야 하는 날이 있어요. 그때 시는 울고 싶어도 못 우는 사람을 위해 대신 울어주는 사명이 됩니다. 저는 수녀원에서는 문서선교의 이름으로 글 쓰는 소임을 받았습니다. 어쨌든 저는 수녀원에 와서 60년대 중반부터 매일 뭔가를 써 왔어요. 지금까지 189번째 노트를 만들고 있네요.



-그렇게 사람들의 영혼을 돌보다 보면, 수녀님 자신에게도 아픔이 쌓일 텐데요. 그때는 어떻게 하시나요.

▶신앙이 있다고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죠. 기도만 한다고 문제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눈물의 시간을 견디면 진주가 됩니다. 내가 알게 모르게 흘린 눈물이 아마 어느 사이 이렇게 진주가 되는 과정을 독자들도 아시나 봐요. 어떤 때는 해결보다 기도를 하며 견딤이 먼저예요. 기도는 문제를 없애는 주문은 아니지만, 문제 속에서도 숨을 쉬게 하는 힘을 주거든요.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이야기 앞에서 수녀님은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글쎄요. 공식적으로 발표된 적은 없지만 해외 문학권에서 가능성이 거론되는 것 같습니다. 저로서는 한국민의 정서를 표현하고 위로하며 그냥 겸손하게 글 기도를 할 뿐입니다. 다만 한국어로, 한국인의 정서를 담아 쓴 시가 세계의 누군가에게도 닿을 수 있다면 우리말의 기쁨이라고 생각합니다.



4시간이나 거의 선 채로 대화를 하고 보니 해인글방의 창밖으로 다시 광안리 바다가 느껴졌다. 겨울 바다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오후의 빛은 조금 낮아진 각도로 바다를 어루만지며 또 다른 윤슬을 만들고 있었다. 광안리 바다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고, 해인글방의 창은 앞으로도 많은 편지를 받아들일 것이다. 급속한 대전환의 시절, 누군가에게 이 시절이 지쳐 주저앉고 싶은 시간일 때, 이곳에서 나아간 한 문장의 시는 치유의 민들레 솜털이 되어줄 것이다. 글이 기도가 되고, 기도가 다시 삶이 되는 길. 이해인 클라우디아 수녀 시인은 그 길을 회피하지 않고 걷고 있다. 하루하루를 기도처럼 살아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한 밀도가 배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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